4월에는 남편의 생일이 있다. 남편에게 제일 필요한 게 뭘까 곰곰이 생각했다. 남편은 가벼운 워킹화를 사 달라고 했다가 신발장을 열어 보더니 운동화가 많다며 사지 말라고 했다. 사 달라고 하면 편한데 알아서 하라고 하면 은근 신경 쓰인다. 그러다 문득 7년 전 골프를 시작하면서 샀던 골프화를 바꿔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생일선물로 골프화를 사 주려고 봤더니 가격도 종류도 천차만별이었다. 관심 없는 척하던 남편도 은근 기분이 좋은지 폭풍검색을 시작했다. 그러다 신화월드 아울렛매장에 원하는 운동화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오늘 우리 부부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집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가서 쇼핑을 하기로 했다.
나는 쇼핑을 좋아하지 않는다. 있으면 입고, 없으면 안 입으면 그만이다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쇼핑하는 건 좋아한다. 말이 안 되는 소리 같지만 사실이다. 돈이 있을 때 쇼핑을 하면 의욕적이 된다. 가끔 우울할 때는 혼자 지하상가를 돌며 옷들을 구경한다. 그러다 마음에 쏙 드는 옷이 있으면 충동구매를 한다.
사실 나는 쇼핑을 좋아한다. 좋은 옷을 입을 때 느낌이 좋다. 내게 좋은 옷이란 몸에 쪼르륵 감기는 옷이다. 옷걸이에 걸려 있을 때는 예쁜 옷들일 지라도 입어보면 어울리지 않을 때가 있다. 가격의 높고 낮음을 떠나 어울리는 옷을 찾으면 기분이 좋다.
남편은 쇼핑을 좋아한다. 하지만 나와 쇼핑하는 방법이 다르다. 처음 들어간 가게에서 마음에 드는 옷을 찾았다고 해서 그걸 덥석 사지 않는다. 조금 더 둘러보고 올게요.라는 말을 하며 가게를 나올 때 남편은 인상부터 쓰기 시작한다. 두 시간 정도 돌아다니다 결국 처음 봤던 곳에서 옷을 살 때도 있다. 남편은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거기나 여기나 똑같다고 말한다. 나는 전혀 다르다는 말로 받아친다. 여긴 이렇게 다르고 저긴 저렇게 다르다고 설명해 봤다 소귀에 경읽기다.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쇼핑을 같이 가는데 매번 싸워서 온다. 싸울 때 싸우더라도 두 손 가득 종이가방을 들고 온다.
제주도에는 백화점이 없다. 예전에 서귀포에 동명백화점이라고 있었는데, 서울에 있는 백화점처럼 규모가 큰 곳이 아니었다. 명품도 메이커도 없이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곳에서 쇼핑을 했다. 지금은 쇼핑할 수 있는 방법들이 다양했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오일장이나 매일시장에서 옷을 샀다. 지하상가나 칠성통, 신제주에 매장들이 생기면서 선택의 폭은 넓어졌지만, 사고 싶은 걸 다 살 수는 없다. 섬이라는 특성상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살짝 기대했다. 서울에 갔을 때 들렸던 파주아울렛이나 현대아울렛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되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오빠운동화를 사러 간다는 1차 목적뒤에는 내 옷도 하나 사야지. 하는 숨겨진 목적이 있었다. 남편카드를 사용할 계획이었다.
남편은 주차장에서 내리지 않았다. 계획이 틀어졌다. 아무리 같이 가자고 설득해도 끄덕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혼자 갔다. 그리고 나는 삼십 분도 되지 않아 빈손으로 나왔다.
인터넷으로 미리 알아보고 간 운동화는 없었다. 할 수 없이 비슷한 디자인의 운동화를 집어서 가격을 물었다.
30% 세일해서 380,000원이었다. 음. 최고가격을 20만 원으로 생각하고 왔는데. 어떡하나. 싶었다. 둘러보고 올게요. 직원이 미소로 대답했지만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는 눈치였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매장들을 둘러봤다. 대부분 30~40% 세일한다는 팻말이 붙어 있었는데, 세일을 해도 매장가격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내 옷은 입어볼 엄두도 못 내고 나왔다.
휘황찬란한 건물 안에는 이름도 모르는 매장들이 가득 있었다. 곳곳마다 사람들이 익숙한 얼굴로 돌아다녔다. 나는 빨리 차에 가고 싶었다.
-오빠, 여긴 아닌 거 같아
-내가 뭐라고 했나. 아울렛이라고 다 싼 게 아니라니까
-있잖아, 나중에 돈을 많이 벌어서 정말 가격표 안 보고 사고 싶은 걸 척척 살 수 있을 때 그때 오자. 여긴 그런 사람들이 와야 할 거 같아. 놀거리, 즐길거리, 먹을거리, 쇼핑까지 다 있잖아. 돈만 있으면 여기서 계속 살아도 될 것 같아. 그런데 우린 아냐.
-근데, 신기한 게 사람들이 많더라. 몰랐는데 제주에 돈 많은 사람들이 많네. 뭘 하고 돈을 벌었을까? 나는 하루에 2,000원씩 저금하는데 여기 오려면 100년을 저금해도 안 될 거 같아.
-착실하게 돈 모은 사람들은 안 오겠지? 비트코인했나? 주식으로 돈 번 거 아냐? 갑자기 공돈이 생긴 게 아니면 여기 못 올 거 같은데.
-오빠, 나 힘들어. 갑자기 슬퍼졌어.
예전에는 몰랐는데, 요즘은 제주도 빈부의 격차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 비슷비슷하게 살았었는데, 갑자기 부자가 된 사람들이 생겨났다. 돈 많은 사람들이 제주에 와서 돈을 뿌린다. 그들을 보며 어떤 이는 부러워하고, 어떤 이들은 따라간다. 보이는 게 전부인 세상에선 과시도 실력이다. 좌절하거나 의지를 불태우거 나다.
-그래도 나 많이 변했지? 예전 같으면 그거 사 왔을 거야. 그런데 선뜻 못 사겠더라. 이상해.
-잘했어. 인터넷으로 부르면 돼.
-집에 가자마자 주문하세요. 오빠, 나 배고파
-밥 먹으러 가자.
그렇게 우리는 잔뜩 기대하고 한 시간을 달려 갔다가 마음의 상처를 입고, 다시 한 시간을 달려 제주시에 있는 식당에 갔다. 점심시간이라 30분을 기다려 맛있는 점심을 먹고, 한적한 커피숍에서 맛있는 커피를 2,700원에 먹었다.
-커피가 너무 맛있는데, 장사는 안 될 거 같아. 사장님이 너무 착해 보였어
-그런데 왜 나쁜 사람이 돈을 버는 걸까?
-돈을 벌려면 무슨 짓이든 해야 하는데, 그걸 못 하는 거지. 평범한 사람들은. 사기꾼들 봐. 마음에 없는 소리도 하고, 얼굴에 철판도 깔아야 하는데 아무나 못하지.
-슬프다. 착한 사람들이 잘 됐으면 좋겠어.
집에서 한 시간 정도 쉬었더니 아이들이 돌아왔다. 피아노레슨을 받는 사이 옷을 갈아입고 삼십 분을 뛰었다. 런데이어플에서 하는 말들을 들으면 1분 뛰고 2분 걷기를 했다. 집에 와서 조금 있다 저녁이 되었다. 사고 싶은 걸 아무 생각 없이 사진 못했지만, 나름대로 평온한 하루였다.
남편이 인터넷에서 고른 운동화를 결제했다. 생일선물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오늘 우리 부부는 종일 같이 있었지만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 갑자기 친해졌다. 불안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