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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마누 Apr 15. 2024

런데이어플을 깔았다.


나른한 일요일 아침이었다. 남편은 문중벌초하러 새벽에 집을 나갔다. 아이들과 적당히 일어나 사과와 콘후레이크로 가벼운 아침식사를 했다. 쉬는 날에는 30분씩 5번 게임을 할 수 있는 아이들이 8시에 게임을 시작했다. 



오랜만에 소파를 차지하고 누워서 티브이리모컨을 들고 채널을 천천히 돌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많은 채널을 보는데 보고 싶은 게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찾아온 시간인데 나도 뭔가 봐야 한다는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채널이 50번대를 넘어 100번대까지 올라갔다. 그러던 중 군산새만금마라톤대회중계에서 시선이 꽂혔다. 



올림픽경기의 꽃은 마라톤이다. 모든 경기가 끝난 마지막 날이 마라톤선수에게는 시작이다. 기다리고 기다리며 자신을 연마했던 선수들이 마지막 날 한꺼번에 뛰어 나가는 모습은 언제 봐도 웅장하다. 마라톤경기는 지루한 듯 흥미진진하고, 똑같은 것 같지만 미묘하게 달라지는 모습을 보며 선수들의 상태를 짐작해 본다. 두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선수들의 표정이 점점 변한다. 발은 무겁고 언제부턴가는 생각 없이 뛰는 것도 같다. 출발할 때 앞섰던 선수들이 점점 뒤처지고 뒤에 있던 선수들이 하나둘씩 제치며 나온다. 



경계하듯 주변을 살피며 뛴다. 자리를 내주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어쩔 수 없다. 몸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한다. 가면처럼 무표정을 유지하지만 속에서 온갖 번뇌에 시달리고 있을 아니다 어쩌면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훈련한 대로 뛰며 페이스를 잃지 않기를 바라는 선수들이 뛰는 걸 본다. 



그렇게 한참 동안 마라톤선수들이 뛰는 걸 보다 갑자기 나도 달리고 싶어졌다. 달려야지 생각하자 금방이라도 달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요즘 열심히 달리고 있는 꿈 이에게 연락했다. 같이 달리자고 할 때는 끄덕도 안 했던 내가 달리고 싶다며 어플을 알려달라고 하자 기뻐하며 흔쾌히 알려주는 영원한 멘토 꿈 이에게 감사했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은 생각지도 않은 순간에 찾아온다. 변화는 손바닥을 뒤집듯 단호하고 갑작스럽다. 한번 그 길에 접어들면 되돌릴 수 없다. 계속 가는 수밖에.



블로그활동도, 소설도, 운동도 그렇게 시작했다. 옆에서 보면 충동적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항상 생각했던 것들이 어떤 계기를 만나 튀어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달리기만 해도 그렇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달리기 신봉자라는 사실은 유명하다. 하루키의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시드니>를 읽고, 달리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다. 다만 때가 아니었을 뿐이다. 뛰어나가려는 욕망을 눈앞에 산적해 있던 현실이 막아섰다. 지금은 그때와 달라졌을까? 



그렇진 않다. 여전히 나는 달리는 게 두렵다. 운동장 한 바퀴를 쉬지 않고 달려본 적도 없다. 헬스장에서도 2분 이상 뛰지 않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달리기가 하고 싶어 졌을까?


만화 <달려라 하니>에서 하니는 엄마가 보고 싶을 때 두 손 꼭 쥐고 달렸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분노의 눈빛을 하며 못된 나애리를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숨도 안 쉬고 전력질주하는 선수들을 볼 때마다 생각했다 저렇게 달리면 좋을까?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고, 숨을 몰아쉬며 헥헥거릴지언정 달리는 순간만큼은 행복할까?



한 번도 뭔가를 성취하거나 죽을 만큼 힘들게 노력해 본 적이 없다. 해 보지도 않고 처음부터 난 못 해라는 말이 얼마나 못난 말인지 잘 알고 있다. 알면서도 막상 눈앞에 일이 닥치면 너를 응원할게. 나는 아니야. 하며 뒤로 물러섰다. 어떻게 내가라는 마음이 늘 앞을 가로막았다.



선수들은 하루나 이틀 동안의 경기를 위해 일 년을 죽어라고 연습한다. 나는 연습도 하지 않으면서 선수가 되어 박수받을 생각만 하고 살았다. 혜성처럼 나타난 신인은 혜성처럼 빨리 사라진다.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꾸준히 하늘을 돌고 있는 오리온별자리처럼 나도 뭔가를 오래 하고 싶다. 



그게 글쓰기든 달리기든 골프든 헬스든 간에 조급해하지 않고 즐기면서 가는 거다. 생각보다 긴 여행길에서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는 재미가 좋다. 그러다 누군가 바통터치를 하면 언제든 선수로 뛸 수도 있다. 그날이 오면 당황하지 말고 먼저 사람이 내민 바통을 잡고 달려 나가고 싶다. 하루하루가 연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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