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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마누 Apr 30. 2023

삼춘과 형님사이

기준은 없어요. 순전히 감입니다


어렸을 때 이해가 안 되는 어른들의 세상이 있었다. 학교나 책과는 다르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아이였다. 그중에 하나가 동네 어른들에게 "삼촌"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배운 삼촌이랑 촌수로 따지면 아버지의 형제들, 혹은 어머니의 형제들이다. 이모나 고모도 모두 삼촌이지만 부모님의 남자형제들을 삼촌이라고 부른다. 삼촌은 친가이고 외삼촌은 외가다. 나는 할머니도 성할머니와 외할머니를 구분해서 불렀다. 외할머니는 "망할 년, 그냥 할머니라고 하면 어디가 덧나는지 꼭 외자를 붙인다"며 섭섭해하셨다. 하지만 그건 나름대로 나만의 방식으로 구분하는 기준이었다




엄마는 만나는 사람마다 "삼촌"이라고 했다. 심부름을 시킬 때는 "춘희삼촌한테 갔다 오라""이거 권희삼촌한테 갖다 주라"라고 말했다. 나는 이해가 안 됐다. 부모님과 성이 다른데 어떻게 삼촌이 되지? 용납을 할 수 없었다. 엄마는 나이가 든 어른들은 다 삼촌이라고 불렀다. 성별을 따르지 않았다. 그럼 진짜 삼촌은 어떡하지? 아빠의 여동생은 고모, 남동생은 작은 아빠라고 불렀다. 엄마의 남동생 4명은 순서에 따라 큰외삼촌부터 꼬마삼촌까지 갔다. 그렇게 정리를 했다.




결혼을 하고 나서 또 한 번 호칭의 문제로 고민이 생겼다. 느닷없이 형님들이 나타난 것이다. 각 잡고 인사하며 "형님"을 외치는 검은 양복사람들 밖에 몰랐던 나는 결혼과 동시에 많은 형님들을 모시게 됐다. 그중에 제일은 큰 아주버님의 부인. 즉 남편의 큰형수이자 나의 큰 형님이었다.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지금은 자연스럽게 형님, 형님. 하고 있지만 초반에는 그 소리를 못해서 힘들었다. 그런데 왜 형님이지? 그리고 사촌형님들이랑 큰 형님의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




남편의 집안에서는 해마다 봄, 가을에 묘제를 지낸다. 일년에 12번 제사 지내는 걸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집이다. 어제 종친회에 속한 많은 형님들이 제사음식을 준비했다. 서열이 낮은 나는 시어머니에게 바쁘다고 말을 하고 동창들과 골프모임을 갔다. 큰 형님은 어머니를 모시고 하루종일 음식을 만들었다고 한다. 막내며느리라서 빠진 건 아니다. 안 가도 되는 것 같으면 굳이 가지 않는다. 며느리로서의 입장과 사생활은 언제나 시소놀이중이다




그래도 사람인지라 어제 못 가서 미안했다. 오늘 묘제에서는 눈에 띄게 열심히 일을 했다. 서열이 낮은 사람이 하는 일이란 간단하다.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열심히 치우면 된다. 누군가 뭘 하려고 하면 자연스럽게 다가가 대신해 준다. 쓰레기를 줍고, 그릇을 치운다. 천막을 걷고 과일상자를 차에 싣는다.




제사를 지내고 난 후 장소를 옮겨 정리할 시간이었다. 큰 형님은 아이들이랑 놀러 가라고 했지만 시어머니가 도끼눈을 뜨고 어딜 가느냐. 눈으로 말을 하고 있었다. 묘제가 끝나고 아이들과 놀러 가기로 했지만 확실하게 마무리를 할 필요가 있었다




졸병이 하는 일. 산더미 같은 젯그릇들을 씻기 시작했다. 손목이 부러져라 박박 씻었다. 나와 다른 집의 막내며느리가  자연스럽게 힘든 초벌설거지를 맡았다. 옆에는 처음 보는 분이 헹굼을 맡았다.




"삼촌, 이거 제가 할게요."


한참 설거지를 하다 옆에 있는 분이 커다란 고무다라의 물을 비우려고 하자 일어서며 말을 건넸다. 순간 느꼈다. 싸늘한 기운이었다.




그분은 말없이 혼자 고무다라의 물을 비웠다. 네 도움 따위는 필요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순간 아차. 싶었다. 삼촌이 아니구나.




각자 맡은 일을 묵묵히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호수로 물청소를 끝내고 돌아서려는데 또 설거지할 게 나왔다. 언제나 그렇듯이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그분이 씻어야 할 소쿠리를 들고 있었다. 호수를 잡았다




저, 아까 죄송했어요. 삼촌이 아니라 형님인데. 제가 뭘 모르고 삼촌이라고 했네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을 맞춘다


나이가 드신 분들은 삼촌이라고 하는 게 맞아. 그런데 요즘은 70도 젊어서 웬만하면 형님이라고 하는 게 좋아. 물론 나도 나이가 들만큼 들었지만.. 사실 아까 삼촌이라는 말 처음 들었어. 가슴이 철렁하더라


어머. 제가 정말 잘못했어요. 절대 삼촌이 아니세요.


저는 그냥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를 때는 그냥 삼촌이라고 하는 줄 알고


그래, 그런데 웬만하면 형님이라고 해. 그게 서로 좋아


네. 형님. 그리고 다시 한번 죄송해요.


아니야. 됐어.




느낌이 맞았다. 그분은 내가 삼촌이라고 부르는 순간부터 얼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내가 땡을 해주기 전까지 한두 시간 동안 얼마나 속으로 많은 생각을 했을까. 마치 내가 결혼은 했지만 아줌마소리를 들으면 화가 났듯이 그분도 삼촌소리에 머리카락이 곤두섰을지도 모른다




삼촌과 형님 사이의 경는 분명하지 않다. 불러주는 거에 따라 달라진다. 하지만 상대 조금이라도 배려 한다면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듣기 좋은 말을 해 주는 것은 어떨까?  나이가 들어도 삼촌보다는 형님이 되고 싶은 마음이  이해됐다.



삼춘이라고 부르면 기분 나빠하는 형님들이 있다. 아무나 삼춘이라고 부른다고 친근감이 형성되는 건 아니다. 형님은 깍두기들보다 더한 충성심을 요구한다. 막내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면 된다. 시댁일에는 나서지 않는 게 좋다. 묘제에서 열심히 설거지를 하고 집에 오면 남편이 치킨을 시켜준다.


 모나지 않게 살아가는 방법을 매일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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