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마누 May 05. 2023

제주에 살면 감수해야 하는 것

계획차질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할까요

남편은 꼼꼼하고 자상한 사람이다. 내가 하는 말을 들었다가 가방이나 옷을 사주곤 한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갔다 온 곳을 검색하고 아무 말 없이 데려가서 놀라게 하는 걸 좋아한다. 집안의 모든 일을 관리하느라 흰머리가 가득하지만 좋아서 하는 거다. 코로나가 터지고 나서 남편은 제일 먼저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행했다. 철저하게 지켰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4년 동안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코로나 전에는 일 년에 두 번씩 해외여행을 갔다. 학원에 보내지 않는 대신 여행을 자주 가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매일 뜨고 지는 비행기를 보며 우리도 나가자고 하는데 남편은 요지부동이었다. 남편의 성격을 잘 알아서 당분간은 국내여행을 다니자고 했다. 그제야 남편이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 어린이날 선물은 경주여행이었다. 역사를 좋아하는 큰아이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마침 좋은 상품이 있었다. 남편의 절친가족과 예약을 하고 준비를 했다. 바로 전날까지 남편은 아이들의 옷을 챙기고 비상약과 그 밖의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체크하고 있었다.



비가 많이 왔다. 바닥에 보글래기가 잡혔다. 옛날 어른들은 바닥에 생기는 보글래기를 보고 비가 얼마나 올지를 알아맞히곤 했다. 잘 모르는 내 눈에도 이번 비는 심상치 않을 것 같았다. 해가 사라지고 하루종일 검은 하늘이었다. 장마처럼 쏟아지는 장대비. 그리고 가까운 데서 들리는 천둥소리와 유리창이 번쩍이는 번개까지. 

느낌이 싸했다.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네이버날씨만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날이 조금 개인 듯하면 기분이 좋았다가 다시 비가 쏟아지면 우울해졌다. 그나마 바람이 불지 않아 비행기는 뜨지 않을까. 생각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이 한구석에 있었다.



오후에 여행사에서 연락이 왔길래 우리는 비가 와도 간다고 했다. 골프를 치다 보면 이런 일이 자주 생긴다. 라운딩약속을 했는데 날씨가 나쁘다고 먼저 취소하면 안 된다. 진짜 못 칠 것 같은 날은 골프장에서 먼저 연락이 오거나 직접 가서 취소해야 한다. 우리는 간다고 했고, 여행사는 알았다고 했다. 그래서 가는 줄 알았다.





늦은 오후. 여행사의 연락을 받았다. 우리가 출발하기로 한 5월 5일 12시까지 비행기가 모두 결항이라고 했다. 대신 부처님 오신 날 연휴에 가자는 말에 답하고 끊었다. 실망할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남편을 쳐다보는데 아이들은 어떡하냐? 그러게. 많이 속상할 텐데.



여행날짜가 잡히면 아이들은 을이 된다. 모든 것이 여행 안 간다 한마디로 끝난다. 밥을 안 먹으면 밥 안 먹어서 아프면 여행 못 가는데. 공부를 안 하면. 이렇게 공부 안 하면 여행 안 간다. 그렇게 한 달을 여행이라는 말을 앞세워서 갑질을 했는데 어뜩하지?

     


아이들은 문자로 결항소식을 받았다고 한다. 늦게라도 가면 안 되냐는 막둥이말에 이렇게 저렇게 설명을 해주는데 아들이 아이들한테 경주 간다고 했는데 거짓말을 한 게 되어 버렸다고 속상해했다. 큰아이가 결항문자를 보여주며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을 하라고 했다. 막둥이는 왜 우리는 꼭 비행기를 타고 가야 돼?라고 했다



비행기. 

제주도에 살면 감수해야 할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이다. 바람이 많이 불거나 눈이 많이 오면 즉 천재지변에 제주에 있는 사람들은 꼼짝을 하지 못한다. 



어렸을 때 남자친구와 여행 한번 못 갔던 이유 중 하나였다. 육지에 갔다가 못 돌아오면 영락없이 들킨다는 생각 하면 도무지 밖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육지에 나가는 건 뭔가 합법적일 때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걸리는 일은 알아서 차단하며 살았다. 가끔 꼭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됐을 텐데 후회가 될 때도 있지만 뭐 어쩔 수 없다. 그게 나니까



문제는 아이들이다. 아이들을 설득해야 했다. 뉴스는 비행기결항으로 난리가 된 제주공항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제주맘에서도 난리였다. 어린이날을 맞이해서 서울에서 내려오는 아빠가 못 오고 있다느니 오랜만에 여행에서 돌아오는 딸이 있는데 언제쯤 결항이 풀릴지 물어보는 글. 그런 비슷한 글들이 게시판에 계속 올라오고 있었다. 해저터널이라도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이 진지하게 나왔다.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기로 했다. 제주의 바람을 막기 위해 초가집이 필요했듯이 지금 바람이 불지 않지만 비행기가 뜨지 않는 이유가 있겠지. 생각하며 포기했다. 그렇게 생각해도 속상한 마음이 모두 사라지진 않았다. 어린이날 경주에 가면 모든 게 만사형통이었는데 갑자기 선물도 사야하고 비오는 데 아이들을 데리고 어딜 가야 할지 생각도 해야한다. 비행기만 타면 되는데 하늘이 허락해주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2023년 5월 5일 어린이날.

하루종일 비가 왔다. 오늘은 어린이날이므로 게임과 티브이를 무제한으로 즐길 수 있다고 했더니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큰딸은 평소에 보고 싶었던 <명탐정코난> 극장판을 아들은 마크를 한 시간 하는 걸 막둥이는 아빠와 보드게임하는 걸 선택했다. 뭘 하든 지겨울 만큼 하라고 했더니 하루종일 열심히 할 것들을 찾는 삼 남매다. 



이른 저녁을 먹었는데 아들이 조금 있으면 사발면이 먹고 싶어질 것 같다고 한다. 아무래도 마트에 갔다 와야겠다. 



한 번도 안 돼. 소리를 하지 않았다. 무조건 예. 를 외쳤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3일 후에 어버이날이다.

부모님이 잘해야 아이들이 잘한다는 걸 알고 있는 누군가의 큰 그림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오늘의 고난을 3일 후에 보상받는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한다. 비가 오는 어린이날이 섭섭한 게 아이들만은 아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삼춘과 형님사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