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마누 May 14. 2023

만보 걷기의 힘

매일 걸으면서 생각합니다.


마흔 살에 셋째를 낳고 생애 첫 건강 검진에서 고혈압판정을 받았다.  산후조리원에서부터 170에서 150을 왔다 갔다 했다. 머리가 아프고 얼굴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새벽에 깨어 잠 못 드는 날들이 이어졌다. 




막둥이는 순한 아이였다. 잘 먹고 잘 잤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입술이 부르튼 큰 딸과 5살 때까지 말을 안 했던 아들을 안아서 키웠다. 친정엄마는 안 계시고 시어머니는 시도 때도 없이 불러서 일을 시켰다.


남편은 방관자였다.




하루종일 헥헥거리는 시간이 계속됐다. 온 힘을 짜내 하루를 살고  부엌에 들어오면 목이 탔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단숨에 들이켰다. 그제야 살 것 같았다. 500ml 캔 하나를 다 마시고 나서 쌀을 씻고 가스불을 켰다. 


그렇게 몇 년을 살았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조금씩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여전히 저녁만 되면 맥주를 마셨다. 처음에는 힘들어서 마셨는데 어느 순간부터 안 마시면 섭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거울을 보지도 않았다. 마흔이라는 고비를 넘기고 나니 우울이라는 친구가 찾아왔다. 혼자 찾아오더니 옆에 앉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술을 마셔야 웃을 수 있었고, 잠을 잤다. 매일 맥주를 마시면서 초기알코올중독증상이나 얼마나 술을 마셔야 중독인지를 검색했다. 아직은 최악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살이 찌고 있었지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뺄 수 있다고 생각해서 방치했다. 그러는 사이 맥주캔과 와인병은 치울 때마다 양손 가득 쌓였고, 몸무게는 6킬로가 늘어 있었다.






막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블로그를 시작했다. 책 읽는 게 유일한 취미이자 즐거움이라 도서포스팅은 힘들지 않았다. 혼잣말을 하던 게 습관이었는데 그 말들을 글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이웃들이 생기고 내가 쓴 글에 하트가 쌓였다. 신이 나서 포스팅을 하루에 두세 개를 올리기도 했다.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 잠이 잘 오기 시작했다.




2022년 겨울 미친 100일 챌린지를 하며 100편의 글을 썼다. 지금 읽으면 얼굴이 빨개지는 글도 있다. 그래도 썼다. 




2023년 1월 미친 챌린지 100일을 함께 했던 사람들끼리 '몸이 먼저다'100일 챌린지를 시작했다. 글을 쓰든 뭘 하든 체력이 먼저다라는 생각에 서로의 운동을 격려하는 모임이었다. 




나는 만보 걷기를 선택했다. 100일 동안 매일 만보를 걸으면 살이 빠질 것도 같아서 보상으로는 100일 후 살이 빠진 내게 청바지와 흰 티를 사주기로 했다.






만보 걷기를 작정하고 시작했다. 하루종일 워치를 착용했다. 웬만하면 걸어 다니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석 달 동안 만보를 걸어도 살이 빠지지 않았다.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우리 동네에는 걸어서 십 분 거리에 사라봉과 별도봉이 있다. 구제주사람들의 운동코스로 가장 유명한 곳이다. 계단을 오르내리면 얼굴이 빨개지고 심장이 빨리 뛴다. 아이들의 학교가 별도봉 옆에 있어서 운동 끝나고 데리러 가면 시간이 딱 맞는다.




오늘은 아침 6시 30분에 혼자 운동화를 신고 나왔다. 어제 만보 걷기를 안 했더니 몸이 찌뿌둥했다. 같이 가자고 했더니 4명이 똑같이 고개를 저었다. 


안 가면 너네만 손해지. 



처음 계단으로 사라봉을 오를 때는 5번 정도 쉬었다.


 요즘은 두 번 정도 숨을 고른다. 계단을 오를 때 요령도 생겼다. 고개를 들고 자꾸 확인하지 않는다. 그저 발아래 계단을 하나씩 밟는데 집중한다. 


그렇게 걷다 보면 어느새 정상에 닿는다. 







언제 봐도 좋은 별도봉길이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배가 떠 있는 곳이 다 바다였다. 공사를 해서 방파제를 만들고 길을 뽑았다. 예전보다 더 좋아진 건 모르겠지만 보기가 좋지 않은 건 분명하다. 그래도 여전히 좋은 길이다. 






오르는 것에 비하면 내려오는 길은 언제나 쉽다. 신이 나서 가끔 뛰기도 한다. 모든 일이 그렇지 않을까. 어렵게 어렵게 올라간 정상에서 누리는 시간은 짧고 내려갈 일만 남아 있다. 하지만 내일도 또다시 올라간다. 




거의 다 왔다고 생각할 때쯤 다시 오르막길이 나온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하지만 저 계단을 오르면 끝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계단은 더 이상 힘든 상대가 아니다. 끝내려면 반드시 올라가야 한다. 마지막 계단을 밟으면 그제야 얼굴이 펴진다. 




성장은 계단과 같다는 글을 봤다. 쭉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한 단계 올라가면 정체기가 온 듯해서 사람의 진을 빼놓는다. 천천히 올라가는 것이다. 





살은 빠지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몸무게는 그대로다. 운동이 끝나면 밥맛이 너무 좋은 게 원인일 수도 있다.  바디프로필을 찍으려고 운동을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몸무게에 연연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혈압약을 먹지 않는다. 병원에 갈 시기를 놓쳐서 한 달 정도 약을 못 먹었는데 혈압이 오르지 않았다. 내과선생님은 당분간 지켜보자는 말을 했다. 석 달 동안 매일 아침 혈압을 재고 있는데 정상혈압이다.




술을 마시지 않는다. 모임이 있을 때만 마신다. 혼술을 끊었다. 만보를 걷고, 책을 읽고, 도서포스팅을 하고, 브런치에 글을 올리려면 술 마실 시간이 없다. 술은 마실 때는 즐겁지만 마시고 나서도 깰 때까지 정상적인 사고를 방해한다. 




오늘이 제일 젊다. 


친구의 프사에서 본 상태메시지다. 공감한다. 그 문장에 나는 하나를 덧붙이고 싶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좋다. 


오늘을 충실이 살면 내일은 조금 나아진다는 것을 알았다. 오늘보다 내일 이웃수가 늘어나고 조회수가 늘어난다. 하고 싶은 일을 참고해야 할 일을 했기 때문이다. 




'몸이 먼저다'챌린지는 끝이 났다. 몸무게가 그대로인   나는 옷을 살 수 없다. 하지만 괜찮다. 챌린지는 끝났지만 일주일에 5번은 오름산책을 할 예정이다. 




처음에는 만보를 걸으면 힘들어서 글을 못 쓰는 게 아닐까. 만보걸을 시간에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만보를 걷다 보니 글이 더 잘 써졌다. 걸으면서 생각을 하고 글을 다듬었다. 매일 같은 길을 걸었지만 볼 때마다 다른 세상이 글감을 던져줬다.




술 마신 다음 날 찌그러진 맥주캔을 치우면 자책하던 시간이 있었다. 지금은  조회수를 확인하고 웃으며 아침을 시작한다. 시작이 다르자 하루도 달라졌다. 




만보 걷기의 힘이다. 힘이 센 내가 됐다. 기분이 참 좋다.




매거진의 이전글 제주에 살면 감수해야 하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