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7일 처음으로 호텔에서 혼자 잤다. 아들과 함께 잘 생각으로 침대두 개짜리 방을 에약했는데, 아들은 친구를 택했다. 7일 9시 30분 비행기를 타고 제주를 떠나기 전 나는 빅씨스 언니와 30분 동안 고강도운동을 한 상태였다.
잠이 오지 않았다. 새벽 5시에 눈을 떴다. 커튼을 열고 밖을 보는데 깜깜했다. 낯선 곳이다. 본능적으로 좀더 날이 밝으면 나가야 한다고 느꼈다. 지루한 시간이 지나고, 사방이 희미하게 밝아올 때쯤 옷을 갈아입고 운동화를 신고 방을 나섰다. 조식준비로 분주한 1층을 지나 호텔밖으로 나갔다. 천천히 팔을 돌리며 걷기 시작했다. 기분이 좋았다.
처음 보는 풍경과 마주하며 걸었다. 나는 혼자였고, 아무도 길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기분이 묘했다. 오십이 다 되어가도 여전히 두려운 게 많았는데,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당당하게 걸었다.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앞만 보며 걸었다.
뒤늦은 조식을 먹고 숙소에 들어왔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걸을 때는 몰랐던 통증이 밀려왔다. 민감한 부위에서 걸을 때마다 쓸리는 기분이 들었다.
혼자 볼 수 없는 곳이었다. 손으로 만져보면 아무 느낌이 없었다. 그런데 아팠다. 많이 아팠다. 어떡하나 하다 옆방에 SOS를 쳤다. 후시딘을 빌려와 어림짐작으로 발랐다. 괜찮은가 싶어 걸었는데 악소리가 났다.
단체톡에서는 개막식을 보러 가자는 말이 오가고 있었다. 나는 걸을 때마다 아프다고 말했다. 약을 돌려 주러 간 방에서 엄마들을 만나 이야기했다. 엉덩이쪽에 뭔가 난 것같다고 하자 누군가 대상포진을 이야기했다. 대상포진예방접종을 맞지 않은 나는 그 말을 듣자 겁이 버럭 났다. 여기서 아프면 낭패다.
대상포진이 얼마나 아픈지는 들어서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증상도 맞는 것 같았다. 약사남편을 둔 덕에 약을 바리바리 싸고 온 엄마가 고농축비타민을 건네주며 이거 먹고 푹 쉬라고 했다.
나는 결국 대회개막식을 포기하고 약을 먹고 침대에 누웠다. 너무 아파서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제주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해 대상포진에 걸린 것 같다고 했더니 빨리 병원에 가라고 말했다. 우리 나이에는 참는 게 아니라며 네가 아프면 아들을 응원할 수 없으니 네이버에 검색해서 병원을 찾아가라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엄마들은 점심을 먹으러 이동했다. 나는 혼자 남는 것을 택했다. 민감한 부위는 여전히 걸을 때마다 아팠지만 배도 만만치않게 게 존재감을 과시했다. 1시가 되자 침대에서 일어났다. 전날 봐두었던 성심당 브런치를 먹으러 갔다. 도착했는데 시간이 지나 먹을 수 없었다. 그때 같이 간 엄마들이 점심은 먹었냐는 카톡을 보냈다. 나는 여전히 쓰리고 아프다고 답했다. 한 엄마가 빨리 병원에 가라며 대전에 있는 정형외과링크를 보내왔다. 눈 앞에 있는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이름을 말했다.
9000원의 택시비를 내고 내렸는데 막상 정형외과를 가려니 왠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행동이 빠르고 생각이 뒤늦게 찾아온다. 그래서 늘 후회한다. 비가 내리는 대전의 이름모를 거리를 걸으며 뭘 먹을까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땀이 많이 나면 두드러기처럼 올라오곤 했던 비루한 내 피부상태가 떠올랐다. 제주에서도 여름이면 알 수 없는 피부질환으로 피부과에 다녔었다.
다시 네이버검색을 하고 택시를 탔다. 택시비 8000원을 내고 내렸다. 택시기사님이 알려준 곳에 피부과는 없었다. 건물안에 들어가고 나오길 반복했다. 오후 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점심을 못 먹은 나는 인내력이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사실 배가 고프진 않았다. 그저 지쳐 있었다. 낯선 곳에서 아무도 없이 아픈 엉덩이를 끌고 거리를 걷고 있다는 사실에 잔뜩 몸이 움추려들었다. 곤색 원피스와 검은 레이벤선글라스로 나의 불안감을 감춘 채 나는 정형외과가 있던 곳과는 다른 느낌의 대전의 어느 한 곳을 헤매고 있었다. 그러다 겨우 피부과를 찾아 들어갔다.
어느 병원이든 처음 방문하면 이름과 주민번호와 주소를 쓴다. 간호사가 어디가 불편하냐고 물었다. 나는 아주 민감한 부위가 쓰리고 아프다고 했다. 의사가 남자인데 괜찮다고 물었다. 아픈데 어쩔 수 없다고 대답하고나서 의자에 앉아 순서를 기다렸다. 제주에도 피부과는 환자가 많다. 대전이라도 다를 게 없었다. 방학이라 그런지 예약한 학생환자들이 계속 들어왔고 나는 계속 기다렸다. 3시가 지났다.
나는 벌떡 일어나 진료를 취소한다고 말한 후 병원을 나왔다. 지극히 P다운 행동이었다. 병원 1층에 있는 약국에 가서 엉덩이에 땀띠 비슷한 게 났는데 바르는 연고를 달라고 했다. 약값은 3,000원이었다.
문제는 숙소로 돌아가는 거였다. 지금 서 있는 곳이 어딘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아무 의미없이 택시비를 지출했다. 스스로에게 화가 나는 동시에 버스를 타고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에 보이는 버스정류장에 가서 대전 DCC로 가는 버스를 물었다. 한 사람은 모른다며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이 맞은 편 버스정류장에 가라고 해서 8차선 도로를 건너 버스정류자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가 오고 검은 선글라스를 낀 나는 대전 DCC를 가냐고 물었다. 기사는 버스를 탄 후 환승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호기롭게 버스에 올라타며 지갑에서 천원짜리 지폐를 꺼냈다. 기사는 버스카드만 가능하다고 했다. 나는 버스카드가 없었다. 하필이면 아들에게 비상용으로 쥐어준 카드가 내 유일한 버스카드였다. 한발 올렸던 버스에서 물러서자마자 버스가 떠났다. 나는 혼자 남겨졌다. 오후 3시 대전의 어느 거리였다.
마침 친한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러움이 복받쳤다. 언니에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했더니 언니가 너는 세 아이를 알뜰하게 챙기는 멋진 엄마라고 말했다. 그러니 아무 걱정말고 카카오택시를 불러라고 했다. 역시 여행을 많이 다녀본 언니의 말은 옳았다. 카카오택시는 내가 있는 곳에 정확히 택시를 갖다 주었다. 택시를 타고 오다 문득 생각이 나 신세계백화점에 내려달라고 했다. 기사는 익숙하게 백화점앞에서 택시를 세웠고, 나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백화점에 들어갔다. 오후 4시였고, 혼자 에스켈레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가 점심인지 저녁인지 모를 밥을 먹었다.
이날 나는 3만보를 넘겼다. 아침에 두 시간이 넘는 산책을 했다. 그랬다해도 걸음수가 많은 건 모르는 곳이기 때문에 헤매였던 헛된 걸음이 많아서이다. 백화점에서도 나가는 길을 몰라 여기 기웃 저기 기웃거렸다.
나이가 들수록 익숙한 곳을 선호할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된 길에 들어섰을 때 다시 돌아나올 수 있는 힘이 점점 떨어진다. 이날 내가 헤매였던 대전의 도시들을 제주라고 생각하면 구제주와 신제주를 오간 것이다. 병원역시 위치를 알고 있었다면 이같은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장님이 코끼리다리를 만지듯 부확실한 것을 붙들고 다니려고 하니 힘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끝나고 숙소에 들어왔을 때 나는 일기장에 성공이라는 단어를 썼다. 이날 내가 한 것은 택시를 세 번 타며 대전시내를 돌아다녔던 것 뿐이었다. 하지만 그 또한 나만의 방식으로 대전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비록 병원투여였지만 걷고, 간판을 올려다보면서 나는 잠시나마 대전시내를 돌아다녔다. 숙소에만 있었다면 몰랐을 일이었다.
희한한 건 아침에는 그렇게 아팠던 것이 병원투어를 하는 동안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약국에서 산 약을 바르지도 않았는데, 증상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제작과제를 마친 아들이 방에 들어왔다. 호텔방에는 싱글침대와 더블침대가 있었는데, 아들은 싱글침대에 눕더니 여기서 자겠다고 했다. 나는 아들의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