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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마누 Nov 25. 2024

견디는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달달한 걸 같이 먹으면 더 달달한 걸

작고 사소하고 없어도 될 것 같은데, 있으면 확실히 도움이 되는 건?


줄리엣 비노쉬와 조니뎁이 나온다는 이유로 선택했던 영화 "초콜"을 세 번 봤다. 처음에는 인물들을 보는 것만으로 좋았는데, 두 번째부터는 초콜릿을 만들어 파는 비안과 마을 사람들의 변화가 눈에 보였다. 보수적이고 재미없는 사람들이 달콤한 초콜릿을 먹고 변하는 건 영화이기에 가능한 일 같았다. 당장 먹고사는 게 급한데 무슨 소리하는 까.



영화 초콜렛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하루 세 번 남편 끼니 챙겨주고 아이들 돌보고 청소기 돌리는 게 전부인 사람처럼 살지 않으면 여기서는 다들 미친 사람 취급을 해요."


시련이 닥칠 때 입 속에 달콤한 초콜릿향이 퍼지면 순간 행복해지는 마법 같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영화 "초콜릿"은 단순하게 먹고사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한다. 공감과 관심, 애정과 사랑은 다정한 손길에 작은 달콤함과 함께 전해지고, 작고 사소하고 없어도 살았던 그것 때문에 사람이 변하고 살아갈 힘을 얻는다.


영화 "초콜릿"을 보고 나면 입 속 가득 달콤함이 퍼진다.





24년 11월은 고단한 달이었다. 허리를 다쳐 이주동안 아무것도 못하는 사이 어렵게 쌓아왔던 루틴이 무너졌다. 글쓰기도, 독서도, 운동도 뒷전이었다. 최소한의 활동만으로 숨이 턱턱 막히게 아팠다. 거기다 독감과 알레르기 비염이 동시에 찾아왔다. 잠잘 때는 깊은 물에 빠진 것처럼 숨을 쉴 수 없었다. 끈적한 콧물 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꼴이었다. 고개를 들면 머리가 아팠고, 앉았다 일어나면 허리가 아팠다. 두 달에 네 번 찾아온 빨간 손님도 나를 괴롭혔다. 폐경이 가까워지면 생리주기가 불규칙하다더니 그런가 보다 넘어가기엔 온몸이 만신창이였다.


다른 건 다 미루거나 하지 않아도 되지만 아이들 밥을 먹이고, 학교 보내고, 집을 정리하는 것은 꼭 해야 하는 일이었다. 영화 "초콜릿"에 나오는 생기 없는 여자들처럼 나는 꾸역꾸역 삼시세끼 밥하고, 엄마로서, 아내로서의 역할을 해나갔다. 시퍼렇게 멍든 가슴을 숨기고,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하는 건 생각보다 힘이 들었다. 틈만 나면 누워서 잠을 잤다. 하고 싶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속상하지 않았다. 아무도 신경 안 쓰는데 왜 굳이 힘들게 해야 할까? 싶었다.


그때, 친하게 지내는 동생에게 연락이 왔다. 내가 무척 좋아하는 동생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전화를 받았는데, 같이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는 것이었다. 잠깐 고민했다. 아이들을 보내고 쉬고 싶은데 10시는 너무 이른 시간 아닌가? 그래도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서 약속을 잡았다.


머리를 감을까 잠시 고민했다. 화장도 귀찮아서 선크림만 바르고 나갔다. 동생은 제주시를 벗어나 달리더니 애월의 어느 한적한 골목길에 차를 세웠다.


동생은 고된 시간을 보낸 후 단단해진 모습이었다. 차에 타자마자 화장지 하나를 코푸는 데 쓰던 나도 어느샌가 기분이 좋아졌다. 자기도 알레르기 비염이 심해서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안다며 마음껏 코를 풀어도 된다는 말이 얼마나 고맙고 좋았는지 모른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한 끼 먹는 걸 숙제처럼 하는 나와는 달리 동생은 미식가에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가성향이다. 맛집탐방을 즐기고, 빵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관심이 있으니 잘 알게 되고, 자꾸 가다 보니 안목이 생긴다. 시야가 넓어지면서 비교가 가능해지고, 그중에서 하나를 고를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내가 동생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다. 그녀의 안목은 뛰어나다.


애월 브런치카페 당당 수플레


동생은 내게 꼭 먹여주고 싶었다며, 능숙하게 주문했다. 그리고 나온 음식이 주는 행복감이란 말도 못 했다. <당당>의 수플레가 최고라고 말하는데, 일단 수플레가 뭐지 모르는 나는 검색먼저 하며 음식이 나오길 기다렸다. 처음 보는 비주얼에 맘을 뺏긴 것도 한순간, 동생이 포크를 들더니 이렇게 툭툭 쳐줘야 한다며 얼른 동영상을 찍으라고 하길래 핸드폰으로 촬영하고 나서 한 입 베어 먹었는데.




와.

세상의 근심걱정이 사르르 녹아 없어지는 맛이었다. 엄청 부드럽고 달달해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뭐 이런 맛이 다 있지? 생각하며 또 한 입을 먹었다. 맛있었다. 또 웃음이 나왔다. 같이 나온 생면으로 만든 버섯 트러플 파스타는 또 다른 맛을 선사했다. 트러플의 뭔지 몰랐지만 내 입에 딱이었다. 이 맛난 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꽉 막혔던 코가 뚫릴 정도로 향이 강하면서 좋았다. 재료들이 과하지 않고 잘 어우러져 눈도 입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신데렐라는 12시가 되기 전에 파티장을 나오며 유리구두 한 짝을 남겼다. 우리는 오후 3시에 학교 주차장에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신데렐라의 파티는 한 번이었지만, 6년 전과 똑같은 일을 4년 더 해야 한다. 아이들은 가끔 혼자 큰 것처럼 말한다. 엄마가 기다리는 건 당연한 일이고, 조금만 늦으면 큰일이 된다.



평화로 다저트카페 마마롱


일찍 만나 좋은 점은 2차를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맛잘알 동생이 이번에는 분위기 좋은 곳으로 가자고 한다. 혹시 가 봤냐는 질문에 나는 수줍게 하지만 당당하게 말했다.

"아니."

"케이크로 정말 유명한 곳인데 몰라요?"

"응."


친정 갈 때마다 지나는 평화로인데, 나는 왜 몰랐을까? 가야 할 길만 알고 옆으로 난 작은 길로 들어설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작고 하얀 길을 좋아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복잡하고 큰길보다 길가에 풀꽃들이 나 있고, 새소리가 들리는 인적 뜸한 작은 길을 걸으며 심심하면 하늘 한 번 쳐다보고, 구름모양 보며 낄낄대던 단발머리 소녀는 운전대를 잡기 시작하자 큰 길로만 다녔다. 일부러 찾아다니지 않으면 앞만 보고 달렸다. 나보다 한참 어리지만, 여기저기 둘러보며 사는 동생이 기특하고 좋았다.



동생의 선물


완벽한 하루였다. 동생이 챙겨 온 선물은 그립감이 기가 막힌 수첩과 와인이었다. 나는 빈손으로 갔는데, 동생은 나를 생각하며 이런저런 선물을 고르고, 내가 좋아할 만한 맛집을 찾았다. 고마웠다.


"언니가 그때 내게 해 준 말이 너무 좋았어요. 제가 **이 때문에 속상해서 어쩔 줄 몰랐을 때. 정말이지 언니밖에 생각이 안 났어요. 그때 언니가 저와 **이를 도와주고 나서 같이 키우자.라는 말을 했는데, 그 말이 얼마나 든든하고 좋았는지 몰라요."


동생도 울고 나도 울었다. 사람들이 가득한 카페에서 거꾸로 매달린 크리스마스트리를 등지고 앉아 우리는 눈이 마주치면 눈물이 먼저 나오면서 말을 이어갔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언니가 너무 따뜻하게 받아줘서 살아갈 힘을 냈어요. 정말 고마워요."

"그때 마음은 진심이었어. 지금도 그렇고. 난 네가 참 좋아. **도 좋고. 같이 살아가는 거지. 앞으로 힘든 일이 더 많이 생길 거야. 내가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그래도 같이 해결하며 살자. 우리 오래오래 같이 가자."


큰 아이가 3살 때 어린이집에서 학부모로 만난 우리는 십 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며 초보엄마에서 애 둘셋의 엄마로 성장했다. 같은 어린이집과 유치원, 초등학교를 보내며 아이들이 커갈 때 엄마들도 실수하고 후회하고 기뻐하다 좋아하며 시간을 보낸다.


세상에 홀로 크는 아이는 없다. 누군가의 사랑과 보호를 받고 자란 아이들은 뿌리를 단단히 내린다.


나는 우리 아이가 혼자 떨어져 있는 나무가 아니었으면 한다. 울창한 숲 속에서 친구들과 어깨를 나란히 겨루고, 같은 하늘을 보고, 찬바람을 견디며 나이테를 만들어가길 바란다. 내 아이가 소중한 만큼 동생의 아이도 소중하다. 그 마음이 동생에게 전달됐고, 혼자 무거운 짐을 졌다고 생각했던 동생이 깊은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작지만 단단한 동아줄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동생과의 시간이 나에게 또 살아갈 힘을 준다.


오늘의 교훈

사람은 밥만 먹고살 수 없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누군가 밥 먹자고 하면 머리를 감고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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