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럴 줄은 몰랐어요

by 레마누

지난주 앞집에 사는 38년생 시어머니의 호출이 있어 올라갔다. 어머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동지불공'이 나왔다. 해마다 12월 22일 동짓날 우리가 다니는 절에서는 동지불공을 드린다. 허리와 다리가 아파서 매일 한의원에 침 맞으러 다니는 시어머니는 절은 못 해도 꼭 절에 가고 싶다고 하셨다. 그 마음을 알기에 같이 가기로 철석같이 약속하고 집에 왔다.



토요일은 오전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세 남매의 스케줄이 꽉 차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영재수업도, 학교방과 후도, 수학학원도 쉬었다. 그동안 군말 없이 토요일아침부터 집을 나섰던 아이들에게 오랜만에 찾아온 꿀 같은 휴식시간이었다. 아이들과 집에서 뒹굴거리며 게으른 시간을 보내고, 저녁에 아이들이 활동하는 바이올린 앙상블에 연습 갔다 세 시간 후에 돌아왔더니 남편이 말했다.


-오늘 동지인 거 알아?

-어? 무슨 소리야? 동지는 내일인데

-어머니가 목욕탕 갔는데, 사람들이 팔 죽 쒀서 나눠줬다고 하면서 왔더라. 달력에도 오늘이 동지라고 쓰여 있던데.


땡. 하고 머리에서 종이 울렸다. 철석같이 믿고 있던 22=동지.라는 공식이 깨졌다는 것보다 동짓날 어머님이랑 같이 불공 가기로 했던 약속을 못 지켜서 실망한 시어머니의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어머님은 모를 수 있다. 내가 정신을 차렸어야 했는데 이게 뭔 일인가 싶었다.



저녁을 안 먹고 우리가 돌아오기만 기다렸다는 말에 서둘러 냄비에 물을 올리고 달력을 봤다. 21일 동지.

빼박이다. 혹시나 해서 절에서 온 문자가 있나 봤더니 있었다. 윽... 확인하지 않았던 건 분명 잘못이다.



-내일 아침 일찍 절에 전화해 보고, 어머님께 말해.


토요일 저녁 9시. 라면의 유혹은 치명적이었다. 나는 다이어트라는 적을 몰아내고 라면국물을 들이켰다. 아빠라면을 탐내는 세 아이들을 위해 라면 두 개를 다시 끓였다. 배부르게 먹으니 근심걱정이 사라지고, 잠이 솔솔 왔다. 뜨거운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스르륵 잠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7시 30분에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 어뜩해요. 동지가 어제였어요

-게난게. 나도 절에 가기 전에 목욕탕에 가신디 주인이 팥죽주멍 말허난 그때야 알았쩌.

-어머니 깜짝 놀라셨겠어요.

-두렁청해라. 무사 동지가 22일 아니

-그러니까요. 저도 22일인 줄만 알았는데 이런 일도 있네요. 어머니, 절에 못 가서 어뜩해요

-나도 이제까지 살멍 이런 일은 처음이여. 동짓날도 변하는 거여이.

-어머니, 제가 이제부터는 달력 확인 잘해서 꼭 지킬게요. 정신 바짝 차려서 이런 일 없도록 할게요. 죄송해요. 어머니.

-기여. 기여. 경허라.



어머님이 늙으셨다. 서릿발처럼 차갑고 호랑이처럼 매섭던 시어머니가 오냐 오냐만 반복하는 게 꼭 외할머니 같다. 여전히 엄마가 무섭고 두려운 남편은 행여나 내가 혼이 날까 싶었을 것이다. 남편은 모른다. 어머님이 얼마나 늙으셨는지. 그래서 아침 일찍 전화해서 어머니 화를 풀어드리라고 닦달했다. 남편은 아무것도 모른다.



아침밥을 먹고 뒹굴거리고 있는데, 앞집 사는 어머님이 내려오셨다. 크리스마스 때 아이들 고기라도 구워주라며 오만 원을 건네셨다.

-어머님이 아이들에게 직접 주세요.



큰아이를 불렀다.

-어머니, **이 이번 기말고사에 반에서 일등 했어요.

-아고 착하다. 잘했다. 잘했어.

어머님이 손을 벌리자 큰 딸이 쭈뼛거리며 다가가 안겼다.

-어머니. &&이는 이번에 전교부회장에 당선됐어요

이번에는 아들을 불러 놓고 할머니에게 자랑했다.

-아고, 잘했다. 선거에 나온다는 말은 들었는데, 아고 잘했다. 잘했어.

이번에도 어머님은 팔을 크게 벌리셨고, 아들은 쑥스러워하며 할머니에게 안겼다.

-어머니, 그럼 사랑하는 어머님 아들이랑 얘기하세요.. 저는 할 일이 있어서요.



한참 동안 어머님은 막내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가셨다. 내가 한 일이라곤 금방 내린 원두커피 두 잔을 갖다 준 것뿐이다. 어머님이 올라가셨고, 우리 가족은 평화로운 일요일오전을 보내며 할머니가 주신 돈으로 뭘 먹을까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다.



동지불공에 못 간 건 속상하지만, 덕분에 동짓날이 변경된다는 것을 알았다. 날짜를 체크하지 못한 건 내 잘못이 명확했기에 시어머니가 화내시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재빨리 사과하고 다음에는 실수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자 어머님도 그럴 수 있다며 수긍하셨다.



그럴 줄은 정말 몰랐어요. 죄송해요. 이제 알았으니 다음에는 실수하지 않을게요.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강철 같은 시어머니도 마냥 화낼 수 없다. 시어머니와 21년째 앞뒷집에 살다 보니 절로 터득한 시집살이의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시어머니는 이해가 되는데, 여전히 남편의 속은 모르겠다. 이 모든 소란을 나 몰라라하고 언제나 저만치 서 있다. 참 신기한 사람이다.



추신 : 동짓날 팥죽을 먹으면 일년 내내 아프지 않고 좋아신디. 올해 못 먹은 게 영 걸렴쩌.


어머님이 혼잣말인 척 다 들리게 말하며 현관문을 나가셨다. 시어머니는 한시도 방심하면 안 된다. 뒤끝도 조심해야 한다. 지나가는 말도 허투루 하는 법이 없다. 우리 식구는 팥죽을 아무도 안 먹는데 어떡하나.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견디는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