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나 지금이나 그다지 변한 게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은정언니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면 허름하고 작은 동네가 CF의 한 장면으로 변했다. 은정언니는 언제나 챙이 넓고 하얀 모자를 썼다. 따르릉 소리를 내면 한창 고무줄을 하던 우리는 양옆으로 갈라섰다. 언니는 곁눈질 한번 하지 않았다. 은정언니의 뒷모습을 보다 보면 고무줄을 무릎까지 올렸는지 오목가슴까지 올렸는지 까먹어서 다시 시작하곤 했다.
은정언니처럼 되고 싶었다. 크고 단단한 대문 안 이 층집. 간간이 들려오는 피아노소리. 학교가 끝나면 절대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은정언니. 사촌동생인 친구의 말로는 집에서 그림만 그린다고 했다. 피아노와 그림. 돈이 없으면 못하는 것들.
피아노학원에 보내달라고 엄마한테 조르다 배부르게 욕을 먹고 이틀 동안 울어서 퉁퉁 눈이 부은 적이 있었다. 거하게 술에 취한 아빠가 큰소리로 나를 불렀다. 미적거리며 아빠 앞에 갔더니 아빠가 웃으며 말했다.
자..
뭐야? 이게?
피아노나 이거나 똑같지. 연습해라.
내가 예술가가 되지 못한 건 이놈의 집구석 때문이야. 입이 부르트게 불어도 결코 피아노소리를 따라갈 수 없었다. 어른들은 은정언니의 집을 두고 쑥덕거렸다. 둘째 부인이니, 남편하고 나이차가 많다느니, 큰언니와 스무 살 차이가 난다느니를 귀 너머로 들으며 생각했다. 아, 부럽다. 은정언니는 정말 모든 걸 다 가진 사람이구나. 자고로 사람이라면 출생의 비밀 하나쯤은 있어야 뭔가 신비로울텐데 비밀이라고는 도저히 만들 수 없는 코딱지만 한 집구석.
무엇보다 부자인 친부모를 찾아 나서기엔 엄마를 너무 많이 닮은 내 얼굴. 은정언니는 무슨 복을 타고나서 저렇게 다 가지고 살까? 싶었다. 그래서 잘 웃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원래 공주들은 도도하고 차가우니까. 나처럼 꽈배기 하나에도 좋아라 폴짝폴짝 뛰지는 않겠지. 어쩌면 갖고 싶은 게 하나도 없을지도 몰라. 다 가졌으니까.
갖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밤하늘의 별 하나에 한 개씩 갖다 붙여도 모자라던 그 시절. 그토록 부러웠던 은정언니가 제일 부러운 순간은 바로 월요일 전체조회시간이었다.
은정언니는 전교생들이 모여 일렬로 선 운동장에서 교장선생님의 말씀 도중 자주 쓰러졌다. 햇빛이 강한 날이나 교장선생님이 자기 목소리에 취해 끊을 타이밍을 찾아 않고 계속 에.. 에.. 그러니까.. 하며 말을 이어갈 때쯤 언니는 마치 마른풀이 손에서 떨어져 나가듯이 풀썩. 하고 땅에 쓰러지곤 했다. 그러면 주변의 언니오빠들이 웅성거렸고 선생님들이 달려왔으며 나는 저 멀리서 은정언니가 선생님등에 업혀 나가는 걸 부럽게 바라보곤 했다. 쓰러져야 하는데. 가느다란 팔을 이마에 짚고 긴 머리를 흩날리며 더 이상 못 견디겠다는 듯이 그렇게 쓰러지고 싶었다.
한동안 은정언니가 안 보여서 친구에게 물었더니 감기에 걸렸다고 한다. 뭐? 감기에 걸렸는데 이렇게 오랫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고? 원래 감기란 열이 나고 몸이 으스스할 때 밥 뽕그랗게 두 그릇 먹고 따뜻한 온돌방에 엎드려 누워서 이불 뒤집어쓰고 땀 한번 쭉 빼고 나면 낫는 거 아냐? 나는 감기에 잘 걸리지도 않아서 결석 한번 안 했는데.
감기...... 어떻게든 감기에 걸려야 했다. 내가 유일하게 은정언니처럼 할 수 있는 건 감기 걸려서 끙끙 앓는 것뿐이었다. 때마침 일기예보에서 내일 비가 온다고 했다. 나는 일부러 얇은 옷을 입고 학교에 갔다. 집에는 살이 나가거나 구멍이 뚫린 우산밖에 없어서 쓰나 마나였다. 수업시간 내내 비님이 언제 오시나.. 창 밖만 내다봤다.
학교가 끝날 때쯤 하늘이 시커메지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앞이 안 보이도록 무서운 비였다. 이런 비는 맞으면 아프다. 매운 손으로 등짝을 연신 때리는 것 같다.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저마다 우산을 펼쳐 들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빗 속으로 뛰어들었다. 금세 옷이 젖어서 몸에 달라붙었다. 나는 곧 감기에 걸릴 생각에 실실 웃음이 나왔다. 친구들이 우산을 같이 쓰자고 해도 괜찮다고 했다. 제일 친한 친구가 그럼 나도 우산 안 써. 하길래 그래, 같이 걷자. 했다.
우리 둘은 뭐가 그리 좋은지 장대처럼 쏟아지는 빗속을 천천히 걸었다. 비가 온다고 사람들은 모두 총총히 걷고 있었다. 아니면 우산을 한껏 자기 몸 쪽으로 당겨서 어떻게든 비를 피하려고 했다.
나는 온몸으로 비를 맞았다. 처음에는 머리에서 흘러내려오는 비가 자꾸 눈에 들어와서 눈이 따가웠다. 손으로 닦아내다 그냥 두었다. 이 정도 비를 맞으면 감기에 걸리겠지? 마침 국어시간에 "소나기"를 배웠다. 나도 "소나기"의 소녀처럼 그렇게 아플 거야.
평소에는 10분이면 도착하는 집을 돌고 돌아서 갔다. 엄마는 홀딱 젖은 날 보며 기겁을 했다. 얼른 옷을 벗으라며 등짝을 한 대 찰싹 때렸다. 비 맞는 것보다 더 아팠다. 동생이 가져다준 뽀송뽀송한 수건으로 몸을 닦고 나니 온몸이 오돌오돌 떨리기 시작했다.
그날 엄마는 처음으로 밥상을 방 안으로 들고 왔다. 나도 처음으로 안 먹을래.라고 말했다. 엄마는 먹어야 낫는다고 했고, 나는 못 먹겠다고 했다. 먹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며 엄마가 밥상을 놓고 나갔다. 이불속에 누워 있으니 자꾸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적당히 식은 흰 죽에 간장을 비벼 먹었다. 시큰둥하게 먹기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바닥까지 긁어먹었다.
다음 날 거짓말처럼 몸이 가뿐했다. 나는 결국 감기도 제대로 걸리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세상일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다.
지금도 장대비가 오는 날이면 그날의 내가 생각난다. 아무 걱정 없이 두 팔을 양껏 벌리고 하늘을 쳐다보곤 했던 그 시절의 내가. 가진 것이 없어서 뭘 갖고 싶은지도 모르는데 그냥 뭐든 다 갖고 싶다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살았던 내가.
날이 조그만 추워져도 춥다고 호들갑을 떨며 보일러를 켜고., 더우면 덥다고 에어컨을 켜면서 지구온난화를 걱정하는 지금의 날 보면 그때의 나는 무슨 생각을 할까? 아마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을 싼다고 말을 하지 않을까?
글을 쓰다 보면 자꾸 예전 일들이 생각난다. 지금의 내 모습은 하루하루의 조각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퍼즐처럼 조각들을 짜 맞추다 보면 언젠가 멋진 작품이 될 것이다. 나라는 작품을 완성시키기 위해 꼭 필요했던 지난날의 조각들을 하나둘씩 찾아내는 시간이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