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감기가 찾아왔다. 하루는 링거를 맞고, 하루는 주사를 맞았지만, 여전히 내 코는 아무 냄새도 맡지 못한다. 침을 삼킬 때마다 목이 아프다. 아픈 걸 참고 밥을 먹는다. 약을 먹어야 감기가 낫고, 감기가 나아야 정신을 차리기 때문에 꾸역꾸역 삼시 세 끼를 챙겨 먹는다.
감기 때문에 머리가 아픈 것보다 소란스러운 단톡방이 더 신경 쓰인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나는 떨어져 있다. 그들이 하는 말속에 끼지 못하고 지켜만 본다. 오늘 어떤 운동을 했는지. 얼마나 걸었는지 인증하는 운동방은 언제나 활기차다. 매일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작가님들과 숙제를 마쳤다고 알리는 이목구비님의 당당한 톡을 본다. 보기만 한다. 가만히
그 안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거리를 두고 봤더니 힘들어도 해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이가 새벽에 열이 40도가 넘어서 한숨도 못 잤지만 운동을 끝낸 엄마가. 일을 하면서 없는 시간을 쪼개 글을 쓴 워킹맘이. 빈혈이 심해서 달리기를 못하지만, 참으면서 책을 읽는 작가님이 핸드폰 안에 있었다.
그들을 본다. 보면서 나는 뭘 하고 있나 생각한다. 병원에서 자궁적출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충격이 컸는데 가만히 돌아보니 동생도 친한 언니도 자궁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 우리 집에 오는 피아노선생님은 10센티의 혹을 안고 폐경까지 버텼다고 한다. 커피를 마시면 화장실을 자주 가지만, 그 정도 불편은 감수하며 살만하다고 말하며 웃었다.
나만 심각했다. 나만. 내가 뭐라고. 왜 나한테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 거라고 착각하며 살았을까? 왜 지금 잘 살고 있는 동생에게 못되게 굴었던 일까지 끌고 들어와서 벌을 받는 거라는 생각이나 하고 못났다. 정말.
또 생각해 보면 이번에 들어가는 소설의 주인공으로 나를 갖다 놔도 좋을 것 같다. 호되게 아프고 나서 삶의 정체성을 찾는 중년여성의 이야기를 쓸 예정이었는데, 내가 갔던 병원이랑 의사를 묘사하면 될 것도 같다. 다르게 생각하면 이것은 어쩌면 기회다.
첫 끗발이 개 끗발이라더니. 25년 시작이 별나게 좋더라. 아직 3월도 안 갔는데 그런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 아니. 싫어. 잠깐 쉬어가라는 신호야. 막둥이 낳고 오랫동안 병원에 가지 않았으니 이번 참에 검사도 하고 잘 됐어. 속이 좀 답답하고, 느글거리고, 배가 묵직하고, 가끔 쿡쿡 찌르지만. 그게 뭐 어때서. 얼굴에 난 여드름보다야 낫지. 얼굴만 멀쩡하면 돼. 속에 혹 있는 건 나밖에 몰라.
전화벨이 울렸다.
-언니.
아들의 친구 엄마다. 내일 학부모 총회에서 운영위원을 뽑는데, 와서 자신을 뽑아달라는 말을 했다. 총회에 참석할 생각이 없었지만 이야기를 듣다 말고, 그래. 갈게. 될 거야. 걱정 마. 하고 전화를 끊었다. 오랜만에 마트에 갔다 왔다. 매화꽃, 목련꽃이 피어 있었다.
봄이 왔구나. 눈발 날리는 중에도 꽃이 피고,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엄마들도 부지런히 제 몫을 다하고 있었다. 그렇게 다들 봄맞이로 분주한데 나 혼자 방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문제를 끌어안고 낑낑대면서 해결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작은 것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문제를 키웠다.
해파리에게도 삶은 아름답고 멋진 것이란다. -중략- 문제는 네가 싸우지 않는다는 거야. 포기해 버렸지. 하지만 죽음과 마찬가지로 피할 수 없는 게 있단다. 그게 삶이야. 지구를 돌게 하고, 나무가 자라게 하는 우주의 힘을 생각해 보렴. 네가 용기와 그것을 사용할 의지만 있다면 같은 힘이 너에게 깃들 거야. -찰리 채플린-
할 수 없다고 생각하다 보면 할 수 없는 이유만 떠오른다. 나에게 집중하는 것은 좋지만, 작은 변화에도 귀를 기울이다 보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것저것 따지면서 따뜻한 방바닥에서 뒹굴어도 되는 시간은 지나갔다. 강력하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 무엇도 나를 주저앉히지 못한다.
바닥을 치고 올라가는 힘. 그건 공짜로 주어지지 않는다. 간절하게 원하고, 갖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 해마다 봄앓이를 한다. 꽃을 피우기 위해 몸살나는 것마냥 아프다. 살을 뚫고 꽃이 피려나부다. 올해는 얼마나 크고 예쁜 꽃을 피우려고 이리 고된 겨울을 주시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