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또 하나 배웁니다.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갓 대학을 졸업하고 우리 학교에 첫 발령을 받은 사회선생님이었다. 작은 키에 동그란 얼굴, 단발머리여서 학생들 틈에 서 있으면 누가 선생님인지 학생인지 구별이 안 갔다. 나는 한창 사춘기터널을 지나는 중이었고, 매일 아침마다 드라이하느라 버스를 놓쳤다. 엄마옷을 몰래 입고 학교 가서 등짝 스매싱을 수없이 맞았지만, 다음날에는 또 엄마옷장을 뒤졌다.
작은 시골의 중학교에는 놀거리가 넘쳐났다. 월요일 조회시간이면 교장선생님은 남의 과수원에서 귤을 따먹지 말아라. 주민들의 항의가 계속 들어오고 있다. 소각장에서 담배 피우지 말아라. 는 말을 되풀이했는데, 학생들도 말하는 선생님도 그걸 지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다.
1학년 때 선생님들에게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몰라도 담임 선생님은 글짓기대회나 행사가 있을 때마다 나를 찾았다. 그때 나는 방송부에 문예부활동이 겹쳐서 꽤 바쁜 학교생활을 하고 있었다. 괜히 겉멋 든 사춘기아이들이 그렇듯 나 역시 선생님이 한번 말하면 죽어라고 듣지 않고, 선생님이 하는 말은 다 꼬아서 듣고, 질문하면 바로 대답하지 않는 걸 멋있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도 담임선생님은 나를 좋아했다. 좋아하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3학년이 되어서도 담임선생님으로 만났다. 나는 그게 좋으면서도 싫어서 싫은 척했다. 일부러 삐딱하게 앉아서 뭐든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고 있었다.
80년대 시골중학교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중3정도되면 다들 경운기나 탈탈이를 몰고 농사일을 도왔다. 우리 집은 밭이 없어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주말마다 도서관에 다닐 수 있었는데, 도서관에서도 노는 언니들이 이 무서워서 어른들이 많은 열람실에서 공부했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하며 살고 있었다.
선생님께 삐딱하는 것과는 별도로 나는 성적과 숙제에 신경 썼다. 아빠는 큰 딸인 내게 관심이 많았고, 성적이 떨어지면 눈물이 찔끔 나게 혼을 냈다. 아빠는 우리가 잘못했을 때면 마당에 나가서 나무 막대기를 주워오라고 했다. 나는 어떤 걸 가져가야 덜 아플까를 생각하느라 아주 신중하게 나무를 골랐고, 아빠는 내가 가져간 걸로 종아리를 때리며 사랑의 매라고 불렀다.
그때 나는 선생님보다 아빠가 더 무서웠다. 그래서 자꾸 놀러 가자는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없었다. 들키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동네에서도 무섭기로 유명해서 친구들도 한두 번 권하다 포기하곤 했다. 아빠의 이름은 내게 두렵지만, 든든한 가리막이었다.
그런 날이 있다. 뭘 해도 안 되는 날이. 꼬박꼬박 숙제를 했는데, 하필이면 그날 공책을 집에 두고 왔다. 숙제를 내기만 할 뿐 한 번도 검사하지 않았던 담임선생님이 그날따라 숙제검사를 했다. 나는 억울했다. 왜 다른 때는 검사하지 않았느냐. 내가 했다는데 왜 믿지 않느냐고 따져 물었다. 나보다 키가 작고, 조금만 목소리가 커져도 얼굴이 빨개졌던 선생님은 나의 급발진에 당황했고, 복도에 나가 벌을 받으라고 했다.
억울했다. 숙제를 했는데 안 가져온 것은 분명 내 잘못이었지만, 그때는 그걸 생각하지 못했다. 했다는 사실에만 주목했다. 그래서 억울했다. 중3들은 정규수업이 끝나면 9시까지 야간학습을 했다. 학교가 끝나서 청소시간에 친구 두 명과 함께 교문을 나섰다.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이었다. 친구들과 버스를 타고 옆동네로 놀러 갔다. 떡볶이도 먹고, 호떡도 사 먹으면서 낄낄거리다 평소 끝나는 시간에 맞춰 집에 들어갔다.
버스에서 내려 동산을 오르는데 엄마가 나와 있었다. 기분이 싸했다. 엄마는 아무 말도 없이 내 몸을 잡아끌더니 집으로 들어갔는데, 신발을 벗으면서 봤더니 낯익은 구두가 보였다. 담임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안방문을 열자 담임선생님과 아빠가 동시에 나를 쳐다봤다. 밤 9시였다. 나는 얼굴이 빨개지고,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당장이라도 아빠가 소리를 지를 것만 같았다. 아빠는 시간이 늦었으니 선생님 버스 타는 데까지 모셔다 드리라고 하며 담배를 찾아 입에 물었다.
선생님은 오랫동안 앉아 있었는지 일어나는데 시간이 걸렸다. 천천히 일어서는 선생님을 보고 있는데 또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다른 아이들의 집에도 갔을까? 작고 허름한 우리 집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빠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버스정류장에 나란히 서 있던 그때는 희미하지만 딱 하나 선생님이 해 준말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려면 해야 할 것을 먼저 해야 돼. 그러니까 **아, 일단 할 일을 먼저 하자.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조금만 참고 지금은 할 일을 먼저 하자. "
청춘드라마처럼 뼈저린 반성이나 각성 따위는 없었다. 그 후에도 나는 여전히 삐딱하게 대답했고, 철없는 열여섯을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기억하며 살았다.
하고 싶은 일보다 할 일을 먼저 하자.
그런데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 뭐지? 그때 내가 생각한 할 일이란 공부였다. 학생은 공부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니까. 성인이 돼서도 할 일이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당장 해야 돈이 나오는 일, 돈이 있어야 하고 싶은 일을 하니까 일단 하고 싶은 건 뒤로 미루고 할 일을 한다. 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그렇게 미루고만 살았다.
그런데 오늘 문득 할 일이라는 것이 내 꿈을 이루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에서 땡 하고 종이 울렸다. 만일 할 일이 나의 성장이고, 나의 꿈을 위한 거라면 지금까지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엄마, 아내, 며느리, 딸의 역할은 처리해야 할 일이 된다. 급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된다.
생각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는 일들,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될 일들을 붙들고 사느라 정작 나밖에 할 수 없는 일들을 등한시하며 살았다. 이제야 그걸 깨달았다. (요즘 나는 말 배우는 아이처럼 매일 뭔가를 알아가는 중이다. 그게 참 재미있다)
만일 내가 시간에 의존하지 않고, 나를 무한대로 키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처리해야 할 것들에 마음을 두지 않고
무한한 것들 정신이나 느낌을 열어둔다면
만일 시간을 가지고 놀 수만 있다면...
나는 충분히 해야 할 일을 하며, 하고 싶은 것을 할 일을 통해 이룰 수 있다. 만일 정말이지 만일 그럴 수만 있다면 나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는 시간을 내가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길 것이다. 소름 끼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