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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지도 않았겠지만

그렇게 흘러가는 일도 있습니다

by 레마누


새벽 2시에 울리는 전화는 불길하다. 핸드폰너머의 동생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언니, 집에 도둑이 들었어."




결혼하고 제주시에서 일하는 동생에게 방 하나를 내주고 같이 살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성산에서 자고 오는 일이 많아서 동생이 집을 지켜주는 형색이었다.




그 날은 동생도 회식이 있어서 늦게 들어왔다. 8월의 더운 여름밤이었다. 하루 종일 내린 비로 세상이 축축했던 그 날. 동생은 유일하게 방범창이 없는 유리창을 조금 열고 나갔고, 도둑은 그 틈새를 놓치지 않았다.




떨고 있는 동생을 달래는 게 먼저였다. 먼저 앞집에 사는 시부모님께 전화를 하고 동생에게 이층 시어머님댁에 올라가 있으라고 했다. 성산에서 제주시까지 오는 데는 한시간정도 걸린다. 남편과 나는 새벽에 쌍라이트를 켜며 집으로 돌아왔다.




전화로 들은 것보다 집은 훨씬 더 참혹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신혼집이었다. 안방에 놓인 침대는 새하얀 레이스의 이불이 예뻤다. 그런데 그 하얀 이불위에 선명하게 신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누군가 위로 올라가 자근자근 밟은 흔적이 역력했다. 알 수 없는 존재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남의 집에 허락도 없이 들어왔던 그는 우리 집 구석구석에 흔적을 남겨 놓았다. 네 개의 방 구석구석마다 돌아다니며 뭔가가 담겨 있음직한 것들. 서랍은 열어서 뒤집혀놓고 박스에 있는 물건들은 모두 꺼내서 쏟아놓았다. 참 부지런히도 했다. 장농 두 개와 박스 8개가 다 나와 있었다.






제일 심각한 건 이불장이었다. 그 사람은 열심히 정말 최선을 다해 우리 집에 있는 모든 이불을 바닥에 꺼내놓았다. 두꺼운 혼수이불과 선물받은 이불들이었다. 꺼내 놓기만 하면 좋았을 텐데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자근자근 밟은 자국이 역력했다. 눈앞에서 씩씩거리며 이불을 밟고 있는 사람이 보이는 것 같았다. 옷장에 있는 모든 옷들과 이불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정작 경찰이 와서 하는 말은 간단했다.


슬리펴를 신은 걸 보니 동네사람인 것 같다. (CSI에 심취해 있던 나는 경찰이 신발의 모양만 보고도 범인을 찾을 것이라고 했지만 절대 아니었다. 경찰은 선명하게 남은 신발자국을 그저 쳐다만 볼 뿐이었다. 잡을 의지가 있었는지 의심이 되는 부분이었다)



잃어버린 것이 있는지 잘 생각해봐라.




사실.


잃어버린 게 하나도 없었다.




우리 집을 조금이라도 유심히 지켜봤던 사람이라면 우리가 자주 집을 비운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차가 마당에 없으면 우리 집에 사람이 없는 것이다.




오래된 집들 속에서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삼층 빌라가 돋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잘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우리 집에는 아무 것도 가져갈 게 없었다. 나는 현금이 없었고 유일하게 가진 귀중품이라면 결혼여물인 다이아반지 하나였다.




그건 장롱 제일 마지막 이불속 깊숙히 숨겨 놓고 있었다. 오래 전에 우리 엄마가 이불 속에 귀중품을 숨겼던 걸 기억하고 나도 엄마를 따라했다. 그런데 그는 우리 집에 있는 모든 물건들을 다 뒤집어 놓았으면서 단 하나 비싼 다이아반지가 들어있는 마지막 이불은 건드리지 않았다.




만약 그가 젖 먹는 힘을 짜내 마지막 이불을 들춰냈다면 그 순간 그는 단순절도범에서 고액의 절도범으로 둔갑했을텐데. 그는 한끗 차이로 우리 집의 유일한 귀중품이었던 다이아반지를 눈앞에서 놓쳤다.




그래서 나는 그만 그를 이해하기로 했다. 그가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우리 집에 들어왔을까 생각하면 안쓰럽기도 했다.




어쩌면 며칠동안 우리 집에 불이 켜지고 꺼지는 것을 확인했을지도 모른다. 비가 오고 날이 어두운 것이 그에게 행운이었을까.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아닌 듯이 어슬렁거리다 문득 우리 집에 들어왔을 것이다. 뭐 하나라도 건지겠다는 마음으로..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겠지. 처음부터 대박을 기대하면 안 되는 거니까.




집은 넓고 네 개의 방마다 놓여있는 장롱들과 박스들.


뭐가 들어있는지 모르기에 하나씩 다 꺼내봐야 했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집, 언제 누가 들어올 지 모르는 상황에서 뭔가 하나는 건져야 하는데 계속해서 허탕을 친다는 건 생각보다 진이 빠지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만 자신의 정체를 들킬 줄도 모른다는 걸 생각하지도 않은 채 집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지근지근 밟기 시작했다. 그렇게라고 해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나는 그런 그를 생각하면 안쓰럽기까지 했다.




경찰은 정말 아무것도 잃어버린 것이 없냐고 물었다.


없다고 대답했다. 사실 오백원짜리 동전을 모은 십만원 정도의 저금통이 사라지긴 했지만 그건 말하나 마나였다.




나는 며칠 동안 그가 남긴 흔적을 없애느라 집에 있었다. 하루 종일 빨래를 빨았다. 건조기가 없던 시기여서 세탁기에서 탈수된 빨래를 꺼내 옥상에 가져가서 나란히 널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며 침입자의 흔적을 모두 지웠다.


3일에 한번씩 집에 오는 남편이 캡스를 설치했다우리 집은 시부모님이 지어주신 집이고 남편은 시어머니가 아끼는 막내아들이었다. 시부모님은 우리 집의 열쇠를 갖고 있었고 내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상관없이 우리 집을 드나들었다. 여름에 거실 문을 열고 소파에 누워 있다 화단에서 물을 주는 시아버지와 눈이 마주친 적이 있었다. 아무리 더워도 나시티와 짧은 반바지를 입지 못했다.



캡스를 달고 얼마 안 있어 어머님이 우리 집에 들어오다 경고음이 크게 울렸고 캡스직원이 출동했다. 어머님은 많이 놀라신 것 같았다. 열쇠를 들고 수시로 드나들던 어머님은 그 후 닫혀진 대문 앞에서 벨을 누르고 들어오셨다. 소파에 누워 있다가 일어날 시간을 벌었다.


살다보면 일이 의도치 않게 흘러갈 때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말 중에 "새옹지마"가 있다.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생각한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이 생긴다. 나쁜 일뒤에는 다시 좋은 일이 생겨서 살아갈 힘이 생긴다. 인생은 그래서 알 수 없는 것이고 살아갈 만한 것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때 도둑이 고맙다. 시부모님이 우리 집에 불쑥불쑥 찾아오는 것때문에 마음고생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말해야 하나. 벨이라도 누르고 오세요. 말을 해야 하는데 차마 하지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고 있었다. 그때 내 고민을 알고 있다는 듯이 그는 찾아와주었고, 경각심만 주는 것처럼 아무 것도 피해를 보지 않았다.




얼굴도 모르는 그가 남긴 흔적 덕분에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는 모르겠지만 그로 인해 많은 것이 달라졌다. 가끔 생각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흘러가는 일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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