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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들의 땅, 대만소설

살아서 귀신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

by 레마누
20240928_104540.jpg 귀신들의 땅, 천쓰홍 장편소설


대만 작가 천쓰홍은 소설가이자 영화배우, 번역가로 현재 독일 베를린 거주중이이다. <귀신들의 땅>으로 대만 최고의 양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금장상 문학도서부문상과 금전상 연도백만대상을 수상했다. 천쓰홍작가는 <귀신들의 땅>의 배경인 용징출신이고, 실제 타운하우스에 살았다. 열여덟에 고향을 떠난 작가는 용징에 글을 쓸 수 있는 책상 하나 없지만, 용징에 대한 글을 썼다. 어렸을 때 기억은 남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라진 용징을 보며, 작가는 자신의 유년이 정말 존재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을 품었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천쓰홍 작가는 줄곧 귀신이야기와 울음에 관한 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한다. 또한 줄곧 하마가 등장하는 소설을 쓰고 싶었던 작가는 <귀신들의 땅>에서 그 모든 것들을 담아냈다. 귀신과 울음과 하마가 등장하고, 어린 시절의 한때 개발붐이 불기도 했던 용징과 이제는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용징의 근현대를 오가며 펼쳐지는 천씨네와 왕씨네의 이야기는 마치 귀신들린 것처럼 재밌고 흥미진진하다.



<귀신들의 땅>의 줄거리


시골의 작은 마을 용징. 한때 개발 붐이 일기도 했으나 이제는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이 곳에 한 남자가 귀향한다. 독일에서 동성 애인을 죽이고 감옥에서 형을 산 뒤에 귀국한 천씨 집안의 일곱째이자 막내 아들 텐홍이 용징에 돌아온 날은 일년에 한 번 귀신들이 나오는 중원절 7월 15일이었다. 한때 인근의 모든 땅을 소유한 유지였지만, 지금은 몰락한 가문의 큰아들 천아산은 간장공장 딸인 아찬과 결혼해서 내리 딸 다섯을 낳고, 아들 둘을 낳았다. 아들이 태어나야 비로소 며느리로 인정받은 아찬은 모진 시집살이의 고단함을 말로 쏟아내며 견뎠다.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사업을 확장해가는 왕가네와 대조적으로 천씨네는 몰락을 계속하고, 출가한 다섯 딸들의 삶 또한 어머니 아찬만큼이나 고되고 험하기만 했다.



귀신들의 땅 용징



사고나 폭력, 재난 등 갖가지 원인으로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죽으면 편히 저승에 가지 못하고 귀신이 된다. 일제강점기와 중국과의 전쟁을 겪으며 타이완의 여자들은 사회적 억압과 성적착취, 심한 차별로 비명횡사하거나 분노와 수치심때문에 자살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죽어 귀신이 된다.



타이완에는 귀신이 유독 많다. <귀신들의 땅>의 배경인 용징에는 일본군인에게 성폭행을 다한 후 시댁에서 내쳐진 아찬의 외할머니가 목매달아 죽은 대나무숲, 억울해서 목 매달아 죽은 천장 대들보, 죽고 떠내려가는 도랑이나 누군지 모르는 시체가 있는 밭어귀등 사람이 사는 어디에도 귀신이 있다. 이 모든 귀신들은 타이완의 역사와 사회가 만들어낸 부당하고 억울한 죽음으로 생겨났다.




<귀신들의 땅>에서는 용징에서 나고 자란 천씨네 가족의 이야기가 날실과 씨실처럼 엇갈리며 펼쳐진다. 7남매의 얽히고 설킨 과거와 현재, 시골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자신의 꿈을 펼치려 했지만 못다 이루고 죽은 아버지귀신과 모르거나 혹은 어려서 저질렀던 행동때문에 후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귀신이나 옛 기억에 사로잡힌 채 현재를 보지 못하는 산사람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말은 어디서 오는 걸까? 뇌에서? 목구멍에서? 아니면 마음에서 오는 걸까? 가끔은 말이 바람으로부터 오기도 하지. 너희 엄마는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했지만 바람 소리를 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사방에서 입으로 소문을 퍼뜨리고 나서 바람이 불기를 기다렸다. 말이 바람을 따라 흩어져 사람들의 입과 귀로 들어가면서 소문이 멀리 전파되고 무수한 귀로 전달되는 것이다. P.287



왕씨네 둘째 아들이 여자를 찾지 않고 어린 남자애만 만진대요.너는 펜이나 키보드로 소설을 썼지만 너희 엄마는 입으로 소설을 썼다. 입으로 이야기를 지어낸 다음, 그 위에 색을 입히고 인물을 첨가하여 소문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허황된 소문일수록 더 잘 믿게 되는 법이다. 소문의 바이러스는 침을 통해 전파되면서 무수한 사람들의 입을 거쳐 수많은 낯선 사람들에게 옮는다. 그런 소문은 추풍나무도 듣고, 양어장의 물고기도 듣게 된다. 베틀후추밭도 듣고 국화도. 마지막으로 떠돌아다니는 귀신들도 듣게 된다. 바람이 불면 소문은 바람에 날려 모든 사람의 귓가로 전파되는 것이다. P.288



아찬은 향로 옆에 서서 활활 타올는 불꽃을 바라보며 한 손으로 어린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을 향로를 향해 뻗었다. 불꽃에 손가락을 데었지만, 뜻밖에도 야릇한 쾌감을 느꼈다. 시어머니가 불처럼 매섭게 그녀의 뺨을 후려치지 않았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화로의 불꽃이 자신의 손을 삼켜버릴 때까지 가만 놔뒀을 것이다. 그때 그녀는 손이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손이 없으면 향을 들고 절을 올리지 않아도 되고, 세끼 식사를 준비하지 않아도 되고, 돼지와 닭을 먹이지 않아도 되고, 마당 청소를 하지 않아도 되고, 밭에 나가 풀을 뽑지 않아도 되고, 어린 아이들을 때리거나 품에 안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P.382




일반적으로 귀신은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다. 원한을 품은 귀신은 사람을 해치고, 죄를 지은 인간은 귀신을 두려워한다.



<귀신들의 땅>의 귀신들은 화해와 용서, 망각의 기능을 한다. 귀신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과거의 실상을 알아차린다. 자신이 귀신이 될 수밖에 없었던 과정은 살아남은 가족들에게 또다른 상처가 되었다는 것이 귀신의 독백으로 드러난다. 살아남아 고통받는 자들은 죽어 귀신이 되고자 한다. 귀신들은 그들의 삶과 생각을 들여다보며 처음에는 분노하고 절망하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끼지만 점차 누그러지고, 화해와 용서의 길로 접어든다. 그때는 알 수 없던 것들을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귀신들의 땅>에서의 귀신은 화해와 용서, 망각의 귀신이다.



남자, 이성, 도시, 권위, 젊음은 강하다. 여자, 동성, 시골, 늙음은 약하다.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에게 큰소리로 말한다. 윽박지르고 함부로 대한다. 일방적인 복종을 요구한다. 태어나서 처음 접하는 사회인 가정내에서도 이와 같은 현상은 그대로 드러난다. 시집살이를 호되게 한 며느리는 자신이 시어머니가 되는 순간 더 무섭게 시집살이를 시킨다. 여자라서 차별당했던 어머니는 내리 딸 다섯을 낳자 차라리 죽어버리라며 욕지거리를 한다. 살고 있는 터전을 무시하고 도시를 동경한다.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할 줄 모르고 끊임없이 다른 것을 탐하다 죽는다. 나와 다른 생각을 배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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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들의 땅, 목차를 적는 것만으로 소설이 된다.



작은 마을일수록 남들 눈에 보여지는 것에 집착한다. 집요하고 잔인하게 사람을 괴롭힌다. 귀신보다 더 못된 사람들이다. 엄마는 종종 말귀를 못 알아듣거나 허튼 짓을 하는 사람에게 "어구 저 귀신은 누가 안 잡아가나."라는 말을 했다. 나는 산 사람을 왜 '귀신'이라고 부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귀신들의 땅>을 읽으며, 제주도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11남매의 둘째로 살아견뎠던 엄마의 삶이 연상됐다. 만일 장편소설을 쓴다면 이런 소설을 쓰고 싶다. 산 사람도 죽은 이도 행복하지 않은, 그러나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아주 작고 작은 귀신들의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



천씨 집안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삶과 죽음, 폭력과 탈주, 사랑과 증오, 문명과 야만이 뒤엉켜 그려지는 이 거대한 귀신극을 읽는 동안,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이미 귀신이며, 우리 곁에 있는 당신 또한 귀신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무엇보다 우리가 그 귀신들을 사랑하고 용서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황인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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