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이다.
일요일 오후 3시부터 5시 30분까지 글쓰기모임이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김경민 작가님이 운영하는 "마녀모임글쓰기"수업은 모임 5일 전에 글을 제출하고, 일요일에 모여 합평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번이 두 번째 모임이다. 첫 번째 합평에서 호평을 들은 나는 잔뜩 고무되어 있었다.
이번에 제출한 소설은 오래전에 도입부만 써놓고 진도가 나가지 않았던 소설을 잡았다. 인물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다 보니 인물이 왜 아파하는지가 보였다. 일단 인물을 이해하고 나니 쓸거리가 생겼고, 쓸거리가 생기자마자 신나게 써나갔다. 술술 글이 나올 때는 손가락에 모터가 달린 것 같다. 생각보다 손이 더 빨리 움직인다. 그렇게 쓴 글은 퇴고할 때도 고칠 것이 별로 없다. 왜? 눈에 뭐가 씌었으니까.
쉽게 쓰인 글일수록 퇴고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간과했다. 내 글에 취해있었다. 취하면 판단능력이 떨어지고, 세상이 마냥 아름답게 보인다. 이런 글을 써낸 자신에게 감탄하며 나는 모임멤버들 중 제일 먼저 글을 제출했다. 심지어 마감일이 수요일이었는데, 더 이상 고칠 것이 없다는 말과 함께 화요일에 글을 올렸다.
올리고 기다렸다. 반응이 오기를. 글이 재밌다는 말이 들리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5월에 작가님은 글을 읽다 말고 전화했다며 소설이 왜 이렇게 재미있냐고 하셨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 전화를 기다렸다. 작가님의 칭찬을 갈망했다. 그러나 일요일이 되도록 작가님은 감감무소식이었다. 느낌이 이상했다.
일요일 모임에서 나는 깨졌다. 내 소설이 박살 났다. 신나게 써 내려간 글은 구조가 엉망이었고, 인물의 심리를 묘사한다고 생각했던 부분은 독자에게 가닿지 않았다. 소설을 읽으며 고개를 갸우뚱한다는 건 나쁜 소설이다. 질문이 많다는 건 소설이 충분하지 않다는 말이다.
어떤 소설은 무슨 뜻인지 몰라도 읽힌다. 뉘앙스만 잡아내도 읽는데 무리가 없다. 재미와 감동과 더불어 탄탄한 구성은 감탄을 자아내고, 아름다운 문장은 입에 오래 남아 읊조리게 만든다.
알면서 그렇게 쓰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너덜너덜해진 소설을 다시 보니 과연 그 말들이 맞았다. 쉽게 써 내려간 글은 믿으면 안 되는 거였다. 나를 믿고 나가기에 나는 아직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번에 쓴 소설을 되살릴 예정이다. 처음으로 하고 싶은 말을 인물을 통해 전달했다. 그것은 짜릿한 경험이었다. 구조와 문장은 다음 문제다. 일단 하고 싶은 말이 생겼다는데 방점을 찍었다.
몰입해서 읽었다. 인물이 안타깝다.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하며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혹평이 가고 호평이 찾아왔다. 그 말들에 힘을 얻고 다시 시작한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항상 두려움과 설렘을 동반한다. 기막힌 소재가 떠올랐을 때의 희열은 말할 수 없이 좋지만, 쓰고 싶은 것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때의 고통은 말로 하지 못한다. 그걸 견디며 쓴다.
제대로 쓰지 못했다는 것은 나의 문제다. 생각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내가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몸은 머리에서 나오는 걸 받아쓰는 일만 하지 않는다. 몸은 글쓰기를 위해 자신을 연마하고, 자료를 찾고, 생각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가볍게 먹으며 정신을 맑게 유지하고, 충분한 수면을 통해 정신을 맑게 만든다. 육체와 정신을 올바르게 가다듬고 생각한다. 어떤 글을 어떻게 쓸 것인가. 답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흰 종이 앞이다. 지나간 일은 잊는다. 맨 땅에 헤딩을 시작하지만, 예전처럼 불안에 떨지 않는다.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작의 설렘만을 간직한다. 불안은 제쳐두고, 나를 믿고 간다. 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할 수 있다. 월요일 아침이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