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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는 독서, 특기는 글쓰기

by 레마누

동생의 전화는 늘 같은 말로 시작한다

바빠?

일하는 동생은 집에만 있는 언니가 바쁠까 봐 그래서 전화가 언니가 하는 일에 방해가 될까 봐 늘 걱정한다.

그러면서도 일이 있을 때마다 전화를 걸고는 말한다

바빠?


나는 늘 바쁘지만, 동생에게는 바쁘지 않다고 말한다. 그제야 동생이 마음 놓고 말을 한다. 거동이 불편한 시어머니와 딱 한 번 똥기저귀를 갈고 나서 발길을 끊어버린 시누이에 대해 말한다. 천성이 착하고 순한 동생은 한참 말을 늘어놓다 말고 문득


맞다. 언니. 바쁘지? 근데 요즘은 뭐 하느라 바빠?

근황을 물으면 나는 수줍게 말한다

나야 늘 똑같지. 책 읽고 글 써.


언니가 정말 대단하다.

뭐가?

그냥, 하고 싶은 걸 계속하잖아.

그것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어.

그래도 잘하니까 계속하는 거지.

정말로 다른 건 못 해.

언니가 관심이 없어서 그래.

그런가?


중학교 2학년, 동생이 초등학교 5학년때 키가 똑같아졌다. 나는 더 이상 키가 자라지 않았고, 동생은 그 후에도 무럭무럭 자라더니 지금은 고개를 한참 들고 봐야 한다. 아빠는 나 대신 동생을 밭에 데리고 다녔다. 나는 밥 하면서 책을 읽었다. 그러다 밭에 갔다 온 사람들이 돌아오면, 작업복을 빨고, 점심그릇들을 씻고, 저녁밥을 차렸다. 동생들은 고된 바깥일일 마치고 돌아왔고, 나는 종일 집에 있었으므로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할 일이 정해지면 그것에 충실했다. 각자의 상황에 맞게 살았다. 농사짓는 집에서는 밭에 갔다 온 사람이 대장이었다. 억울할 건 없었다. 동생들은 나보다 키가 클 뿐만 아니라 힘도 셌다.



큰 딸은 살림밑천이라고 하는데, 나는 풀알레르기가 있어서 밭일을 못했다. 일머리도 없어서 동생이 십 분이면 끝내는 걸 삼십 분이 넘도록 낑낑댄 적도 있었다. 아빠는 나만 오면 쓸 데가 없다고 했고, 엄마는 정신을 딴 데 팔고 다닌다며 정신차리고 살라고 했다.


아궁이에 불을 때며 책을 읽었다. 부지깽이로 불을 안으로 담으며 불을 때야 하는데, 가끔 책을 읽다보면, 불조절할 타이밍을 놓쳤다. 고무타는 냄새가 나서 봤더니 슬리퍼에 불이 붙은 적이 있었다. 그때 하필이면 엄마가 들어와서 그 모양을 보고, 등짝을 때리며 말했다.

"내가 책 읽지 말라고 했지!!!!!!!"




출처 : 픽사베이


책 읽고 글 쓰는 것이 제일 재미있다.


나는 외골수다. 하나밖에 모른다. 늘 다른 세상을 꿈꾼다. 힘들고 고된 일이 생기면, 일상의 나를 세워놓고, 진짜 나는 다른 곳으로 간다. 책은 성능좋은 자동차이자 비행기였고, 책을 펼치면 나는 어디든 갈 수 있었다. 내가 책을 읽는 건, 지식을 얻기 위함도, 변화하기 위함도 아니다. 나에게 책은 도피처다. 절대 들키지 않을 나만의 아지트다. 일상은 버거웠고, 싸우면 항상 패배했다. 그럴 때마다 책 속에 들어가 숨을 고르고, 눈물을 흘렸다.


읽다 보니 쓰고 싶어졌다. 내 일이지만, 종이에 쓰면 내 일이 아니다. 일기장에도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글로 쓰면, 당사자가 아니라 관찰자가 된다. 더나가 위대한 창조자가 된다. 글 안에서는 마음대로 놀 수 있다. 그것은 신나고 재미있는 일이었다. 틈만 나면 이런 저런 상상을 했다. 사건사고를 앞에 두고, 이야기를 만들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얼마나 힘이 들까?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 뭘까?


비밀을 좋아한다. 사람들이 이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라고 하며 말을 꺼내면 심장이 뛴다.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는 말을 종이에 옮긴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나만의 이야기로 만든다. 티나지 않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 긴가? 민가? 난가? 아닌가?


이름을 바꾸고, 살던 곳에서 전혀 다른 곳으로 옮기고, 성별을 바꾸고, 성격을 만들면 이야기는 손 끝에서 절로 나온다. 내가 할 일은 그저 받아쓰는 일뿐이다. 신이 나게 키보드를 쳐댄다. 키보드는 치는 맛이 좋다. 끊기지 않게 소리가 나야 한다. 손이 머리를 따라가지 못할 때가 많다. 생각이 쏟아져 나올 때는 금을 캔 것처럼 신이 나고 설레어서 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이렇게 재미가 있으니 안 할 수가 없다.

이 재미있는 걸 매일 해야 하니 바쁜 것이다.

동생이 그걸 알고 대단하다고 말한다.

대단한 일을 해서 대단한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것을 지금까지 하는 게 대단하다는 말이다.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시간과 공을 들인다. 엄마가 했던 말을 이제 동생이 돌려 말한다.

그렇기에 나는 보여줘야 한다.

내가 하는 일이 허튼 짓이 아님을

공중에 누각을 지을 수도 있다는 것을

글로 보여줘야 한다. 오랜 시간 간절히 염원했던 것.

한 번도 놓친 적 없는 '소설가'라는 꿈을 실체로 만들어야 한다.

나는 지금 그것을 하고 있다.

긴가민가할때는 머뭇거리지만,

확신이 생기면 달려나간다.

끝이 보이지 않을 때는 힘이 들지만,

결승선이 보이면 젖먹던 힘까지 끌어모은다

전력질주.

지금이 그때다. 가슴을 내밀고 결승선을 끊어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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