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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마누 Jun 09. 2023

점점과 속솜하라

외할머니의 당부


100살을 바라보는 외할머니와 통화를 할 때마다 하는 말이 있다



바로 점점과 속솜행 살라다.



할머니는 9명의 자식을 낳았고, 51세에 할아버지와 사별을 했으며 3명의 자식을 앞서 보냈다. 신장 하나를 떼어냈고, 백내장이 심해져서 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할머니의 점점은 이럴 수가! 정말이니? 별 말을 다 듣는다. 진짜? 의 모든 함축적 의미가 담겨 있다.



할머니는 매번 시어머니한테 잘하라는 말을 하신다. 아마 할머니의 며느리들이자 내게는 외숙모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시는 것 같다. 그중에서도 속솜행 살라는 말을 자주 하신다.



속솜하다는 제주도 사투리다. 속솜이란 속으로 쉬는 말의 준말이다. 4.3 사건에 대해 제주어른들이 말할 때 속솜허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조용히 해라. 말하지 말라. 얼마나 무서웠으면 숨 죽인 세월이 길었으면 입버릇처럼 하고 계실까.



할머니에게 시어머니란 무서운 존재이므로 속솜하며 살았을 것이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속에서 나오는 울화를 안으로 삭히며 그렇게 세월을 버텨왔다. 그런데 요즘 며느리들은 그게 아니니 할머니는 이해가 안 되기도 하고 못 마땅하기도 할 것이다. 그걸 직접 며느리들에게 말하지 못하니 그저 얘기 잘 들어주는 외손주한테라도 속솜행 살라 속솜행 살라. 하신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친정이라고 의지할 데가 없어진 외손주가 행여나 시어머니에게 자신의 며느리들처럼 말대꾸하고 하고 싶은 말 차근차근 다 하고 살면 미움을 받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에 할머니는 속솜행살라는 말만 하신다.



알고 있다. 알고는 있지만 20년째 앞뒷집에 살면서 할머니가 말하는 것처럼 속솜해서 살 수는 없었다. 나는 적당히 할 수 있는 선에서 하는 며느리가 되기도 마음먹었다. 가끔 80넘은 시어머니의 돌발적 행동에 이해가 안 되고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있지만 외할머니를 떠올리면 넘어가기도 한다.



어제도 그런 날이었다. 아침 6시 30분에 전화하셔서 새우리 베어 놨으니 가져다 김치를 하라는 것이다. 새우리는 부추의 제주도사투리다. 어머님은 우리 집 옆에 있는 작은 텃밭에서 온갖 작물들을 키우시는데 여름이면 새우리가 쑥쑥 자란다. 베어낸 자리가 휑하다 싶다가도 비 한번 오고 나면 쑥 자라 있다.



얼마 전에 주신 새우리로 김치한 지 열흘도 안 지났는데 다시 하라시니 어쩌나 싶었다. 그러나 어쩌랴. 해야지. 외할머니말씀 마따나 시어머니의 전화는 점점 많아지고 요구사항도 점점 늘어나지만 속솜하고 그러려니 해야지.



네. 하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이들 픽업을 끝내니 저녁때였다. 식구들이 밥 먹는 사이 김치양념을 만들고 식탁을 치우고 난 후 새우리를 무쳤다. 하기 전까지는 구시렁구시렁 해도 하고 나면 뿌듯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우리 집 김치냉장고에 김치통이 하나 더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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