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은, 얇은 여울을 감추고 있는 바다에 우뚝 솟아 바다가 거칠어지면 곳곳에서 몰려오는 성난 파도에도 미동도 하지 않고, 쉴 새 없이 밀려드는 파도의 오랜 침식도 견디는 바위와도 같다. 덤벼들고 공격하라. 나는 그것을 견뎌냄으로써 그대들에게 승리할 것이다. -세네카인생철학이야기 中
그는 세 남매 중 장남이다. 밑으로 두 살 터울의 여동생이 둘 있다. 종갓집 장손으로 집안 어른들의 기대와 이쁨을 받고 자랐다. 학습 능력이 뛰어나서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온갖 대회를 섭렵했다. 글짓기, 웅변, 수학경시대회, 육상대회까지 1등을 도맡았다. 월요일 전체조회 때마다 교장선생님에게 상을 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웃으면 눈이 아래로 내려가는 푸근한 여자였다. 억센 바닷가동네에 시집와서 물질하는 해녀들 틈에 살면서도 모진 소리 한번 들은 적이 없었다. 산골에서 나고 자라 바닷바람에 얼굴이 뒤집히고, 물고기보다 돼지고기를 더 좋아했지만, 남편의 고향이 곧 내 집이다 생각하며 살뜰하게 세 남매를 키웠다.
그의 집은 대대로 내려오는 재력가 집안이었다. 한때 그 집안의 땅을 밟지 않으면 동네를 벗어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은 아니어도 신식으로 지은 이층 벽돌집에 거실에 나무계단이 있었다. 동생들은 양장점에서 맞춘 원피스를 입고, 피아노를 쳤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집 앞을 지나가다 피아노 소리가 들리면 고단한 걸음을 멈추고 잠시 넋이 나간 것처럼 서 있곤 했다. 봄날에 해바라기 하는 노인들도 피아노소리를 감상하는 열혈관객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손끝이 야무졌다. 철마다 김치를 하고, 된장과 고추장을 담가 마당에 나란히 서 있는 항아리를 채웠다. 벽을 타고 오르는 붉은 장미에 줄을 묶어 고정시키고, 데이지꽃을 잔뜩 심어 화단을 만들었다. 붉은 진달래와 노란 국화가 철에 맞춰 피어나는 것도 그녀의 솜씨였다.
어느 날, 그의 아버지가 울며 매달리는 어머니를 끌어내고 대문을 잠갔을 때, 그는 방에서 울고 있었다. 평소에도 술을 마시면 아무에게나 손찌검을 하던 남자였다. 다른 때와 다른 건 이번에는 어머니의 가방을 던지고, 어머니의 손을 잡아끌고, 어머니의 등을 내려치고, 뺨을 후려치고, 세상의 모든 욕을 퍼부었다는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그렇게 십 년을 공들인 집에서 쫓겨났다. 10살, 8살, 6살 세 남매의 이름을 부르며 밤새 대문을 두들기다 목이 쉰 그녀는 새벽에 가방을 끌며 작은 어촌 마을을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울다 지쳐 잠이 들면서 모든 것이 꿈이길 바랐다. 자고 나면 어머니가 부엌에서 끓이는 된장국냄새가 날 것이라고 믿었다. 술에서 깬 아버지가 정신을 차리고 대문을 열면 어머니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들어올 것이다. 그렇게 믿으며 우는 동생들을 다독였다.
다음 날 그의 어머니가 돌아선 대문을 열고 들어온 건 고모보다 더 어려 보이는 여자였다. 아버지는 세 남매를 불렀고, 여자를 어머니라고 부르라고 했다. 그는 혀를 깨물어 나오는 피를 삼켰다. 그는 아버지집에서 스무 살이 되자마자 나왔다. 종갓집장손이라며 집안일이 있을 때마다 그를 추켜 세우던 집안의 어른들은 아버지의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못 했고, 고모보다 더 젊고, 동네 어느 여자보다 진하게 화장하는 그 여자와 살며 아버지는 가지고 있던 재산을 하나둘씩 처분하기 시작했다.
한때 그 집안의 땅을 밟지 않으면 동네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 돌 정도로 땅부자였던 그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집을 팔아 손에 넣은 돈을 들고 여자가 사라진 날, 그의 아버지는 대문을 나서다 쓰러졌다. 어머니가 밤새 두들겼던 대문의 손잡이를 잡고 누워 있는 남자를 동네 사람이 발견하고 병원에 옮겼다.
소식을 들은 그가 아버지를 찾아갔다.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아버지는 그 옛날 아무에게나 손찌검을 하던 무서울 게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눈을 찌르며 후회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모르고 원망과 푸념을 욕설과 함께 뱉어내는 추한 노인이었다.
그는 대학을 가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들어간 그는 졸업과 동시에 취직을 했고, 방을 얻을 돈이 생기자마자 두 동생을 불렀다. 일하고, 월급을 받으면 쪼개고 쪼개면서 살았다. 동생들의 학비를 대고, 옷과 화장품을 사주며, 그와 동생들이 견디는 동안 그의 아버지가 뭘 하는지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매일 밤 김치에 소주를 마시며 속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기운을 삼키며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아주 오랫동안 누워 있었고,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그가 병원비를 내는 것은 당연한 거라고 같은 병실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나서 사람들의 빈축을 샀다. 아버지가 죽었다는 전화를 받고 그는 슬픔보다 안도감을 느꼈고, 그런 자신이 섬뜩했다가 고개를 흔들어 무서운 생각을 떨쳐 버렸다.
두 아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고 있는 지금 그는 가끔 그때가 생각난다고 한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아니라 남자라고 생각하면 그런 일들이 생각보다 많이 일어난다는 말을 했다. 나이는 살아온 세월을 대변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나이를 꽁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냐며 소리를 지른다.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 번쯤은 생각대로 되기를 바라며 산다. 그 삶을 만들어가는 것은 나임을 알지 못하고, 혹시?를 붙잡고 살다 역시.나할때쯤 끝이 보인다.
작은 얼굴에 선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는데, 목소리가 굵고 말이 무겁다. 크고 힘줄이 솟은 손은 고단한 일상을 대변했다. 말이 많지 않은데, 하는 말마다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자꾸 몸을 앞으로 기울이게 된다. 푸념도 하소연도 비난도 하지 않으면서, 제 삶을 들려주는 그 사람이 궁금해졌다. 그가 살아온 세월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 많은 우여곡절과 역경을 뚫고 나갈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인지 말해 달라고 청하자, 희미하게 웃었다. 소주잔을 내려놓으며
-다들 그렇게 삽니다게. 별의별 사람들이 다 이서.
나만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억울하고 분했다. 아무나 붙잡고, 이 억울함을 이 부당함을 알아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말수가 적은 그는 나에게 말했다. 다들 그렇게 산다고. 불행의 경중은 무게를 잴 수 없다. 어떻게 일을 겪어냈는지, 어쩌면 견뎌냈는지, 그도 아니면 살아남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 이제야 조금 보인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