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제일 슬픈 말, 나중에
“복날에 삼계탕을 먹으러 가자는 게 그렇게 잘못한 거야?”
잔뜩 화를 내고 방으로 들어가는데 남편의 말이 날아와 꽂혔다. 돌아서서 못다 한 말을 쏟아내려는데 뒤따라 오는 막둥이와 눈이 마주쳤다.
학교에서 삼계탕을 먹었는데 엄청 맛있었다고 막둥이가 차에 타자마자 종알거렸다. 4학년 오빠가 오늘은 초복이라는 말을 했고, 중학생 큰 딸이 복날에 삼계탕을 먹으면 감기에 안 걸린다는 말을 보탰다.
“그런데 왜 우리는 삼계탕을 안 먹어?”라는 막둥이의 말이 목에 걸려 물을 마시고 있을 때 남편이
“왜 먹고 싶어? 중복에 삼계탕 먹으러 갈까?”
라고 하자 아들이 벌떡 일어나 달력에 동그라미 표시를 하고 도장을 찍었다
성이 다른 네 명이 작당 모의를 하는데 혼자 폭발한 나는
“당신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라며 남편에게 원망의 화살을 쏘았다. 방금까지 종알거리던 아이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씩씩대며 부엌을 나서는데 뒤통수가 따가웠다.
어렸을 때 엄마는 여름이 되면 커다란 가마솥에 장작불을 때서 토종닭을 삶았다. 검고 무거운 솥뚜껑을 열고 찹쌀과, 대추, 인삼을 넣고 시장에서 사 온 닭 두 마리를 넣는다. 엄마의 얼굴이 불에서 익어갈 때 우리 세 자매는 셋이 누우면 꽉 차는 방에서 낄낄대며 웃다가 울곤 했다. 그러다 엄마가 부르면 얼른 달려갔다.
소금과 김치, 된장과 고추를 올려놓는다. 막내가 숟가락을 상 위에 놓고 있으면 엄마는 솥에서 금방 꺼낸 커다란 닭을 쟁반에 담고 왔다. 8명의 가족이 엉덩이를 붙여 앉아 닭을 먹었다. 엄마는 김이 펄펄 나는 다리를 뜯어 할아버지와 아빠 앞에 갖다 놓는다. 가슴살을 손으로 찢어서 말 만한 딸들에게 나눠 줬다. 입술이 반지르르해지고 봉그랗게 배가 부르면 잠이 솔솔 왔다.
닭다리를 먹은 건 대학생이 된 후였다. 시내에서 자취했는데 큰외삼촌이 점심을 사 준다고 해서 처음으로 삼계탕집에 갔다. 뚝배기 안에 다소곳이 들어 있는 작은 닭을 본 순간 ‘뭐야? 닭이 왜 이렇게 작아?’ 생각했다. 먼저 닭다리를 들었다. 퍽퍽한 가슴살과는 달리 쫄깃하면서 부드러웠다. 나만을 위해 차려진 밥상은 처음이었다. 진정한 어른이 된 것 같아 마음이 우쭐했다.
엄마와 나는 닭요리를 좋아했다. 돼지고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아빠와 동생들과는 달리 우리는 돼지고기를 먹으면 탈이 나곤 했다. 음식에도 궁합이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아무리 비싸고 좋은 음식이라도 내게 맞지 않으면 못 먹는다. 살아간다는 것은 내게 맞는 게 뭔지 알아가는 과정이다. 아무리 알려 주지 않는다. 도전과 실패를 통해 깨닫는다. 인생이란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엄마와 나는 삼계탕이 맞는다.
그날은 초복이었다. 저녁에 엄마에게 삼계탕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영상통화 속 엄마의 흙 묻은 얼굴은 화를 내는 건지 웃는 건지 분간이 안 됐다.
“딱 지치다. 나중에 먹자.”
엄마가 말했다.
“엄마, 김 서방이 시간 내서 가는 건데, 저녁만 먹고 금방 올게요.”
“나중에. 일 좀 한가해지면 그때 먹자 응?”
“엄마는 왜 맨날 힘들다고만 해?”
입에서 나오자마자 후회할 말을 했다. 왜 그랬을까? 나는 농사일로 힘든 엄마에게 삼계탕을 사 주는 착한 딸이 되고 싶었다. 10년 만에 생긴 아이가 아들이라는 말을 엄마에게 해 주고 싶었다. 욕심. 그건 나의 욕심이었다. 전화로 말해도 됐을 텐데. 그 말을 하면 엄마는 활짝 웃으며 얼른 내려오라고 했을 텐데.
다음 날 엄마가 돌아가셨다. 새벽에 마늘밭에 닭똥비료를 뿌리고 아침밥을 먹으러 돌아오는 길이었다. 음주운전에 신호위반을 한 차에 치여 한마디 말도 못 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토록 바라던 큰딸의 임신 소식을 듣지 못한 채. 엄마가 좋아하는 삼계탕을 실컷 먹지도 못하고.
첫 월급을 타고 부모님을 삼계탕집에 모시고 갔다. 엄마는 천천히 살을 발라 먹으며 맛있다는 말을 연신 했다. 닭다리 먼저 먹는 우리를 본 아빠는 “모녀가 얼굴만 닮은 게 아니라 먹는 것도 똑같다”라고 했다. 우리는 깔깔 웃으며 뚝배기를 기울여 죽을 긁어먹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속상한 일은 생각하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떨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그날 저녁에 엄마가 오지 말라고 해도 내려갔어야 했는데, 그러면 엄마는 배부르게 삼계탕을 먹고 잤을 텐데. 다음 날 새벽에 일하러 갈 때도 힘이 불끈불끈 솟았을 텐데. 그러면 트럭 뒤에서 비료 포대와 함께 날아가지 않았을 텐데. 48킬로의 엄마가 바람처럼 날아가지 않고, 우리 아이들에게도 외할머니가 있었을 텐데. 그 후로 나는 삼계탕을 먹지 않는다.
지나간 일을 되새기며 살았다. 후회와 원망으로 지어진 감옥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엄마가 되었지만, 감옥 안에서 나는 여전히 엄마가 그리워 우는 아이였다. 밖으로 새어 나오지 못하게 입을 막고 울음을 삼켰다 슬픔은 세월이 지나며 단단해졌고, 나는 웃으며 우는 어른이 되었다.
“엄마랑 같이 삼계탕 먹으러 가고 싶다.”
귀에서 징 소리가 났다.
“엄마, 먹으면 힘이 난대. 우리 선생님이 그랬어. 엄마도 먹어 봐. 내가 닭다리 하나 줄게.”
“치킨을 먹을 때마다 닭다리를 사수하는 네가?”
피식 웃음이 났다.
오래전 60초 백열등 아래 허름한 부엌에서 장작불을 때며 가마솥에 닭을 삶던 엄마가 떠올랐다. 젊고 예쁘고 힘이 센 엄마가 웃는다. 세 아이의 엄마가 된 딸을 보며 웃는다. 그제야 나만 바라보는 아이들이 보였다.
나는 지금껏 엄마가 내민 바통을 잡지 않았다. 바통을 건네받는 순간 엄마가 사라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경기장에 있으면서 차례가 와도 달리지 않았다.
엄마는 최선을 다해 엄마의 인생을 살고 가셨다. 엄마의 딸이 커서 세 아이의 엄마가 됐다. 엄마는 열심히 달려와 내게 바통을 건넸고 이제 내 차례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나만의 운동장에서 내가 만들어가는 시간에 충실해야 한다. 멀리서 아이들이 응원하고 있다. 나를 믿고 나만을 바라보는 가족들이다. 만국기가 휘날리고 응원가가 울려 퍼진다. 입술을 깨물고 가슴을 쭉 내민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린다. 운동화는 가볍고 심장은 튼튼하게 뛰고 있다. 두 팔을 힘차게 흔든다. 엄마라는 이름표를 가슴에 붙이고 오른손에 바통을 꼭 잡는다.
“여보, 우리 저녁에 삼계탕 먹으러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