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날리기 1

by 레마누



대학생이 된 후, 처음 나간 미팅에서 미영은 수철을 만났다. 각자 소지품을 꺼내면 여자들이 선택하는 것으로 상대를 정했는데, 미영은 가위바위보에 져서 마지막에 남은 물건을 가져야만 했다. 친구들이 담배나 라이터, 볼펜, 삐삐등을 집었다. 같은 과에서 나왔다는 남자들의 소지품은 스무 살을 갓 넘긴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가질만한 고만고만한 것들이었다. 그중에 가장 눈에 들어왔던 것. 그것 하나만 남았다.


미영은 마지못한 것처럼, 어쩔 수 없지. 하는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 자동차키였다. 사람들이 우와. 하고 소리를 질렀다. 커피숍에 들어올 때부터 보였던 그 사람이 손을 들었다. 미영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렇게 미영의 첫사랑이 시작됐다. 자동차키의 주인은 군대를 갔다 온 복학생이었다.


친구들은 나이차이가 많은 아저씨라고 불렀다. 미영은 목소리가 크고, 자기주장이 강한 남자가 좋았다. 무슨 말을 해도 거침이 없고 모르는 것이 없는 남자는 학교생활에는 관심이 없었다. 덩달아 미영도 수업에 빠지는 일이 많았다. 미영은 21살에 아들을 낳았고, 미영의 엄마는 남자의 등을 내리쳤다. 미영은 남자와 단칸방에서 아이를 키우며 자신이 꼭 드라마여주인공 같았다. 미영의 역할은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서 뭐든 다 하는 청순가련한 여자주인공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미영과 같은 드라마를 찍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처음 미영이 그걸 깨달은 건, 아들의 우는 소리가 듣기 싫다며 남자가 집을 나갔을 때였다. 그 후부터 남자는 툭하면 집을 나갔다. 미영이 생활비가 떨어졌다고 말하면 인상을 쓰며 알았다고 했다. 아들이 아플 때는 엄마가 그것 하나도 똑바로 못 하냐며 화를 냈다. 미영은 남자가 소리를 지를 때마다 아들이 놀랄 것이 걱정돼서 알았다고 했는데, 나중에는 정말 알았는지 아니면 순간을 외면하기 위한 방책인지도 모른 채 그냥 지나가는 일들이 생겼다.


남자는 한 곳에 오래 다닌 적이 없었다. 한 곳에 썩기엔 너무 아깝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남자는 정작 뭘 하고 싶냐고 물으면 말을 더듬거렸다. 남자는 오랫동안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규칙적으로 미용실을 다녔고, 염색을 자주 했다. 남자의 옷에선 항상 싸구려향수와 찌든 담배냄새가 났다. 남자의 얇고 작은 손가방 안에는 여러 종류의 명함들이 있었다. 아들이 학교에 제출할 거라고 하며 남자에게 아버지의 직업이 뭐냐고 묻자 남자는 사업가라고 말하고 크게 웃었다.


단 한 번이었다. 틈이 벌어진 순간 찾아온 사람에게 마음을 보였던 건 정말이지 그때뿐이었다. 서른에 열 살 난 아들이 있는 미영은 언제부턴가 웃음을 잃었다. 한창 피어나는 친구들과 비교하면 밖에 나가기가 싫었다. 피부는 푸석하고, 머리는 정신이 없었다.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 눈에 띄게 예뻤던 그래서 늘 주목받았던 미영은 사라졌다. 아이가 잡아당겨 늘어난 티셔츠와 입고 벗기 쉬운 고무줄바지를 입고 거울을 보지 않던 미영이 유일하게 마음을 터 놓았던 친구였다.


미영의 말을 남자는 듣지 않았다. 어떤 말을 해도 바람은 용남 할 수 없다며 미친 듯이 화를 냈다. 이혼하자는 말이 두렵지는 않았다. 남자와 좋았던 시절이 있었지만, 끝났다는 것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미영이 순순히 헤어짐을 말하자 남자의 화가 더 심해졌다. 남자는 이를 갈며 미영에게 나가라고 했다. 미영이 가방을 들고, 아이를 안았을 때, 남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아들을 잡아챘다. 또래보다 유독 작은 아들은 10살이었지만, 7살처럼 보였다. 남자가 우악스럽게 잡아채자 아들은 이내 얼굴이 하얘졌다. 미영이 손을 놓지 않으면 아들은 고통스러울 것이 뻔했다. 미영은 무릎을 꿇고 빌었다. 남자는 굳은 얼굴로 아들은 절대 안 된다고 말했다. 아들은 남자에게 끌려 방에 들어갔다. 방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 전 들은 이야기를 제 방식대로 풀어쓰며 삶에 대해 생각하는 중입니다. 다음 주에 이어집니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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