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날리기 2

by 레마누
istockphoto-859761378-1024x1024.jpg 출처 : 픽사베이


희숙은 20년 차 보험설계사다. 입사할 때는 오래 근무할 생각이 없었다. 스스로를 내성적이라고 생각하는 희숙에게 영업사원이란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 부모님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셨고, 희숙은 선택의 여지없이 살 길을 찾아야만 했다. 누구나 일정시간의 교육을 받으면 취직이 가능하고, 하는 것만큼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꽤 매력적이었다. 천성이 성실하고 부지런한 희숙은 고객 한 명, 한 명에게 최선을 다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객은 언니, 오빠가 되었고, 그들과 함께 나이를 먹었다. 그리고 희숙은 지금 어떤 누구와 만나도 능숙하게 말을 건넬 수 있는 보험설계사이자 보험왕이 되었다.


20년째 희숙은 몸무게의 변동이 없었다. 고객을 상대하는 자신을 쇼윈도의 인형이라고 생각하며, 엄격하게 관리했다. 보이는 직업이라는 특성에 맞춰 운동하고, 옷을 갖춰 입었다. 동료들은 지독하다고 했고, 언니는 마흔이 넘었으니 이제는 조금 풀어져도 된다고 하지만 어림없는 소리였다. 자기 관리와 더불어 희숙은 돈관리에도 철저했다. 그건 사람만 좋은 남편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남편은 늘 돈사고를 쳤다. 친하지 않은 친구가 안쓰럽다며, 보험을 들었고(그 말을 듣자, 나는 불쌍하지 않나며 소리를 질렀다), 이번만 도와달라는 직장 동료에게 돈을 빌려준 것도 여러 번이었다. (물론 그 돈을 받아온 것은 희숙이었다.) 남편은 희숙의 그런 행동을 부끄럽게 여겼지만, 아내 덕분에 이 정도로 산다는 것을 술자리에서 큰소리로 말하고 다녔다. 남매가 태어나자 희숙의 돈돈돈은 더욱 심해졌다.


희숙은 절대 친구들과 돈거래를 하지 않는다. 가끔 언니에게 돈을 빌릴 때가 있었지만, 한 달 이상을 넘기지 않았다. 희숙에게 신용은 목숨이었다.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고 섭섭할 인연이라면 끊어져도 괜찮았다. 부모에게 받은 재산이 없고, 남편이 흐리멍덩한데도 희숙은 학군 좋은 곳에 아파트를 마련했고, 아이들은 두세 군데의 학원을 다니며 부족함 없이 크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의 이면에는 돈벌레 희숙이 있었다.


희숙이 며칠째 밥을 못 먹고 있다. 자려고 누우면 한숨먼저 나왔다. 남편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이건 창피함과 곤란함을 동반한 문제였다. 희숙에게 풀지 못한 숙제를 안긴 건 아들의 가장 친한 친구인 재민이의 아빠였다.


재민이는 아들과 초등과 중학교를 같이 다닌 절친이다. 공부 잘하고, 성품이 좋아서 친구들 사이에 인기가 많았다. 키가 크고 축구를 잘하는 재민이는 늘 반장을 도맡아 했다. 재민이가 학생회장에 나왔을 때, 희숙의 아들은 재민이네 집에 살다시피 하며 홍보물을 만들었고, 제 일처럼 선거운동을 했다. 희숙은 예민한 시기의 아들에게 좋은 친구가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아들이 재민이를 만날 때마다 용돈을 충전해 주었다. 시험기간에 재민이네 집에서 밤새워 공부한다고 하면, 간식으로 햄버거를 들고 찾아가기도 했다. 재민이는 희숙을 볼 때마다 깍듯하게 인사했고, 늘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희숙은 철없는 아들이 재민이를 보고 배웠으면 좋겠다 싶으면서도 재민이의 부모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이렇게 완벽한 아들을 낳았는지 궁금했다.


재민이가 이혼한 아버지와 둘이 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교시간이나 학원 앞에서 몇 번 눈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무슨 일인가 있어서 전화번호를 교환하긴 했지만, 따로 연락을 취할 일은 없었다. 재민이의 아버지는 늘 반듯했다. 늘어진 운동복에 맨투맨만 고집하는 남편과는 달리 동네에서 만날 때도 단정했다. 몸에 잘 맞는 깔끔한 옷은 중년남자의 호감도를 높인다.


그러니까 그날, 재민 아버지의 전화는 뜬금없었지만 영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이들 문제로 엄마들끼리 얘기하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희숙은 반갑게 전화를 받은 것이다. 재민의 아버지는 희숙의 안부를 물었고, 희숙의 일에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자신이 속한 단체에서 무료로 홍보를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아무리 친한 사이여도 뭔가를 하려면 노력이 든다. 그걸 꽁으로 먹으려 한다는 발상 자체가 도둑놈 심뽀다. 무엇보다 신세 질 일은 만드지 않는 것이 좋다. 희숙은 부드럽게 고맙지만 사양한다는 뜻을 전했다.


그렇게 일단락된 줄 알았는데, 다음 날에 또 전화가 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좋은 기회라며 희숙을 회유했다. 돈이 한 푼도 들지 않는다는 말에 희숙은 잠깐 고민했다. 무엇보다 재민이도 참석하는 큰 행사이므로 아들과 함께 오라는 말까지 하자 희숙은 알았다고 대답했고, 재민의 아버지는 활짝 웃으며 희숙의 신상정보를 물었다. 그리고 다음날, 형식상 돈이 오간 흔적이 필요하니 입금을 해주면 금방 다시 돌려준다고 했다. 희숙이 입금하자 다시 연락이 와서 한 건만 더 부탁한다고 했다. 그렇게 희숙은 재민의 아버지 통장으로 돈을 입금했다.


입금확인만 하고 돈을 돌려준다는 했던 말이 사라지자 희숙의 돈도 없어졌다. 하루가 지나자 희숙은 문자를 보냈고, 뭔가 착오가 생긴 것 같다며 바로 확인하고 보내겠다는 답을 들었다.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희숙은 하루를 기다렸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희숙은 핸드폰을 들고 망설였다.


조금 기다릴까? 너무 재촉하는 것이 없어 보이지 않나?

아니지. 두 번이나 착오가 생기지는 않아. 뭔가 잘못된 것이 분명해.


생각지도 않은 일 때문에 시간낭비한다는 것이 짜증 났다. 피 같은 돈을 받지 못하고 있는데, 하필이면 상대가 아들의 친구 그것도 재민이의 아빠라는 것도 희숙을 난감하게 만들었다. 남편의 친구라면 얼굴을 붉히면서 악다구니를 해서라도 돈을 받아냈을 텐데. 희숙은 마른 입술을 깨물다 핸드폰을 들었다.


재민의 아버지는 입원중이라 입금을 못했다며 연신 미안하다고 했다. 사람이 아프다는데 돈 얘기를 꺼낸 것이 무안할만큼 사과하길래 몸조리잘하라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이사장이 입원한 것과 직원이 입금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지? 순간, 소름이 끼쳤고 희숙이 다시 전화를 했을 때, 핸드폰은 꺼져 있었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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