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면 달려갑니다

보호자

by 레마누


십 년 전 일이다. 큰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한시름 놓고 있을 때 남편이 목에 이물감을 호소했다. 평소에 아프다는 말을 잘 안 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이 아프다고 하면 정말 아픈 거다. 근처 종합병원에 데리고 가서 상담을 받고 초음파를 찍었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 조금 더 큰 병원에 가라는 것이 아닌가. 익숙한 장면이다.



여기도 종합병원인데 굳이 큰 병원에 가라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는데. 말은 안 했지만 불안해하는 남편의 손을 꼭 잡고 병원 대기실 앞에서 말했다.



오빠. 아무 걱정하지 마.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오빠 꼭 지켜줄게. 나만 믿어.



밤새 잠을 못 잤는지 푸석푸석한 얼굴에 마흔도 안 된 사람이 흰머리는 왜 그렇게 많은지. 지금까지 남편만 믿고 편안하게 살았는데 갑자기 세 살 난 아이와 아픈 남편을 챙겨야 하다니. 정신 똑바로 차려야 했다. 남편을 대기실의자에 앉혀 놓고 접수를 하고 계산을 했다. 마치 중환자라도 된 것처럼 남편도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그렇게 맘 졸이던 시간이 지나고 결국 남편은 역류성식도염과 위궤양을 진단받고 얼마동안 약을 챙겨 먹었다





결혼식 때 아빠가 행진을 하지 않겠다는 말을 결혼식 하루 전날 했다. 제주에서는 결혼식 전날 가무잔치라고 해서 그때 웬만한 손님들이 다 찾아온다. 큰 딸의 결혼식에 부모님은 마당에 천막을 두 개 쳤고, 돼지를 12마리 잡았다. 동네 사람들은 밤이 늦어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술을 마시고 윷놀이를 했다. 마당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으며 안방에 6 식구가 모여 있었다.


12시가 조금 지나는 시간이었다. 엄마는 빨리 자라고 했지만 잠이 안 와서 우리끼리 마지막 밤이라며 오손도손 앉아 있을 때였다. 내일 식장에서 아빠가 네 손을 잡고 들어갈 일은 없을 거다. 그니까 그때 당황하지 말고 그냥 김서방 손 잡고 같이 입장해라.



결혼식 하면 떠오르는 장면. 신부와 신부의 아버지가 행진을 해서 주례 앞으로 가고 신랑이 마중 나오면 신부는 아버지의 팔짱을 풀고 신랑의 팔을 잡는다. 나도 당연히 그렇게 할 줄 알았는데 아빠의 말은 갑작스러웠다. 딸을 넘기는 거. 그거 맘에 안 든다. 넌 그냥 김서방 하고 같이 걸어가라. 난 널 김서방한테 넘겨줄 생각 없다. 결혼해도 네가 내 딸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너랑 김서방은 똑같이 출발하는 거다.


그것만 기억해라.



집 앞에 사는 시어머니는 은행에 갈 때면 꼭 나를 부른다. 아들도 아니고 큰며느리도 아니다. 막내며느리이자 집 앞에 사는 내게만 전화를 한다. 어떤 때는 귀찮고 어떤 때는 아무 생각 없이 같이 걸어가서 어머님께 여기저기 사인 하세요. 하고 사은품을 들고 집에 오면 어머니는 그건 네가 가져가라. 선심 쓰듯 말한다. 가끔 만원을 주시면서 아이들 빵이라도 사 주라고 말씀하신다.



하루는 은행에서 다른 볼일을 보느라 늦게 나왔는데 어머님이 농협 옆에 있는 여성복 매장의 가판대 앞에 서 계셨다. 눈치를 보니 가판대에 있는 바지를 사고 싶으신 것 같았다. 그런데 사장이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삼촌 입을 옷은 없어요. 갑써게.



마치 우리 어머님을 귀찮은 벌레 취급하며 파리채를 흔들 듯 양팔을 흔드는 모습에 화가 났다. 어머니, 하고 옆으로 다가가 팔짱을 꼈다. 어머님은 백만 대군을 만난 것처럼 환하게 웃으셨다. 왜요? 바지 사게? 제가 다른 데서 좋은 거 사드릴게요. 일부러 사장님이 들으라고 크게 평소보다 훨씬 상냥하게 말했다. 그리고 같이 걸어가서 더 큰 가게에서 좋은 옷을 사 드렸다. 물론 울 서방님 카드였지만 어머님도 오빠도 기분 좋은 쇼핑이었다.



살다 보면 내가 보호자일 때도 있고, 누군가가 나를 보호해 줄 때도 있다. 상대적인 것이다. 역할을 정해놓지 않은 자유극처럼 왔다 갔다 하며 살면 된다. 융통성 있게.



나는 못해라는 말보다 그래? 그럼 내가 해 볼게. 하는 말을 조금 더 자주 하면서 그렇게 살다 보면 누군가 내게 어깨를 기대 오는 게 은근 기분이 좋기도 한다.



사람이 사람과 어울려 산다는 건 생각보다 의지가 되는 일이다. 그게 가족이든 친구든 자식이든. 도움이 필요할 때 솔직하게 도와달라고 말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누가 도움을 청할 때면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 흔쾌히 들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보호자로서 보호를 받는 사람으로서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



주의할 점 도와 달라고 말을 하기 전에 먼저 말하면 간섭이 된다. 아쉬울 때 짠 하고 나타나는 게 중요하다. 답답하다고 절대 먼저 나서지 말아야 한다. 그게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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