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끝나도 조금 앉아 있다 일어나는 편입니다
영화를 보고 제 마음대로 써 본 소설도 아니고 잡설도 아니고 콩트도 아닌 글입니다. 궁금하시면 영화를 직접 보세요. ^^
바쁘게 지나가는 일상의 연속이다. 가볍지만 격식을 갖춘 옷을 입고 고객의 전화를 받는 내 모습이 제법 그럴싸해 보이기도 한다. 고객의 전화를 받고 찾아가는 길 새로 지은 이층 건물이 깔끔해서 쳐다봤다. 미술관인가? 전시실? 심플한 하얀색의 벽을 따라 고개를 돌리는데 이층 넓은 창에 서 있는 여자는 아영이다.
아영이는 전여자 친구다. 대학교 1학년때부터 서른 초반까지 우리는 연인사이였다. 올림머리가 잘 어울렸던 아영이는 여전히 긴 목을 드러내는 머리묶음을 하고 누군가에게 활짝 웃고 있었다. 그런데 아영이가 그림을? 부동산중개업을 하지 않았나? 십 년이 넘게 만났지만 가끔 낯설게 느껴진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창 밖으로 보이는 그녀를 쳐다봤다. 문득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하게 웃으며 오른손을 흔들었다. 내가 알던 아영이라면 8개의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겠지
잘 차려입은 옷으로 무장한 그녀는 나를 본 듯했지만 금세 고개를 돌렸다. 머리보다 높게 올라간 팔이 무안했다. 나는 그제야 그녀가 완전한 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름이 생각보다 먼저 찾아왔나 보다. 덥다.
아영과 나는 대학교에서 만나서 오랜 시간을 사귀었다. 아영은 잘 나가는 전시화가였다. 나는 그림을 그만두고 공무원시험을 준비했다. 애당초 기간이 정해져 있었다. 공무원시험준비란 게 말처럼 쉽지 않았고 시간은 내 속과는 다르게 무심한 듯 빠르게 흘러갔다. 아영은 그림 그리는 것을 포기하고 부동산중개업자가 되었다. 나는 아영의 집에서 아영이 주는 카드를 쓴다. 아영은 늘어진 티셔츠와 체크무늬바지 입은 내게 갖춰 입으라고 말을 한다. 공부할 때 잘 다려진 와이셔츠와 양복바지가 얼마나 불편한지 아영은 모른다
시간이 흐르고 아영과 나는 똑같이 나이를 먹었다. 나는 변함이 없고 변할 생각도 없는데 아영은 자꾸 뭔가를 요구한다. 늘어진 티셔츠를 몇 번 매만지더니 한숨을 쉰다.
앞머리를 넘겨도 보고 내려도 보는 아영의 눈에 비친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영이 헤어지자는 소리를 할 리가 없었다. 파닥거리며 마치 죽을힘을 다해 살고 있으니 제발 알아달라는 아영의 손짓 발짓 눈짓을 모를 만큼 바보가 아니다. 나는.
헤어지자.
그래서 먼저 말했다. 아영은 죽어도 말하지 못하겠지만 제일 듣고 싶었던 말. 아무것도 못 해줬던 내가 유일하게 해 줄 수 있었던 말. 헤어지자
아영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아영의 전화번호를 지웠듯이 그녀의 핸드폰에 내 전화번호가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예전처럼 그녀의 SNS를 들락날락하지 않아도 된다. 그녀의 이름은 닉네임이 아닌 풀네임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렇게 아영과 나는 헤어졌다. 햇살이 밝은 오후 흰색벽이 만지고픈 건물 아래서 나는 그걸 알아챘다. 딱히 슬플 것도 없어서 올렸던 오른팔을 얼른 거두고 약속장소로 서둘러 갔다.
그녀와 나는 그렇게 헤어지면 안 될 것 같더니 헤어져도 아무 일이 없었다. 가끔 생각나는 사람일 뿐이다.
사족 : 이동휘라는 배우를 좋아한다. 그의 연기 같지 않은 연기를 좋아한다. 그런데 이번 영화에서 그는 정말이지 최고였다. 스포가 될 수 있지만 말하고 싶다. 담에 걸린 연기는 핸드폰만 쳐다보던 남편을 영화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그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정은채라는 배우는 잘 모른다. 하지만 현실 속에 있을 법한 인물을 잘 표현해 낸 것 같았다. 예쁘게 웃을 때는 영화배우 같았지만 남자친구 앞에서 보이는 모습은 현실여자 친구 그대로였다. 오랜만에 재미있는 영화를 봤다.
조금 아쉬운 점 : 남자는 왜 동창인 여자와 헤어지고 한참 어린 여자와 사귀며 행복했을까? 여자가 돈 많고 능력 있는 남자 앞에서 흔들리는 게 이해되는 걸 보면 나도 어쩔 수 없는 속물일까? 오랜만에 몰입 제대로 하면서 봤다.
(아이스커피를 들고 기다리는 남자) 혹시, 커피 드시면.. 산미 있는 거 괜찮으세요?
사무실 들어가시는 거면 태워다 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근처에 볼 일이 있어서요
(아영은 매너 좋고 돈 많은 CEO와 사귄다. 인정. 반전주의.
(호프집에 들어온 여자. 짧은 치마를 입고 있다)
오래 만났어요?
200일쯤 만났나? 안 맞아
SNS에 누구랑 있나 맨날 확인하고. 뭐 하나 올리면
약간 좀꽉 잡는 스타일이구나
그렇게 하나하나 따지고 의심하면 그건 사랑이 아니잖아요
나는 대학생이고 지는 돈 벌고 하니까 지가 좀 더 위에 있다고 생각했나 봐요
(여자말을 듣던 남자 고개를 숙이고 웃는다) 그런 사람들이 있죠
(씁쓸하게 웃는 남자) 왜 웃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남자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오빠, 만나는 사람 있어요?
(남자 정색하며) 지금요? 아니요.
왜 헤어졌어요?
(잠시 생각하더니) 글쎄, 한 세 달 좀 됐나?
-남자가 어린 대학생 여자를 만난 것도 얼굴이 활짝 핀 것도 이해가 됐다. 남자는 엄마처럼 자신을 누르고 있던 아영을 못 견뎌했다. 책임지고 싶지 않았다. 대학생여자는 먹고 싶을 때 먹고 하고 싶은 건 하고 살라며 남자에게 말했다. 헐랭이같이 살아도 된다고 했다. 남자는 그 말을 들으며 아영을 생각했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 있을지 몰랐지만 최대한 그렇게 살고 싶었다. 남자는 사귀자는 여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오랜만에 달달한 영화를 봤다. 보는 내내 적고 싶은 대사들이 많아서 멈춤 버튼을 자주 눌렀다. 오랜만에 남편과 낄낄댔다. 하루종일 비가 내리고 몸은 축축 처지는데 진한 커피 마시며 영화를 봤다. 만족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