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경아 Dec 08. 2022

두 사람에서

여섯 사람이 되었다~

두 사람에서 세 사람이 늘어나 다섯이 되었다. 늙고 병든 한 사람이 돌아왔다. 젊은 세 사람이 나갔다. 늙은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나갔던 한 사람이 돌아왔다. 한 사람과 어린아이 둘이 ‘집’에 왔다. 마침내 여섯 사람이 되었다.     


부모님은 몇 년 전 겨울에는 두터운 점퍼를 입어야 하고 여름이면 오징어처럼 구워지는 덥고 습한 오래된 주택을 정리하고 인근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오래된 아파트지만 리모델링 공사를 해서 쾌적하고 자재를 새로 깔아 깔끔했다. 내외가 가족들의 뒷바라지로 지친 남은 노후를 살뜰하게 보내기 좋은 공간이었다.   

  

갓 스물 스물일곱의 여자 남자는 결혼과 동시에 시부모, 시동생, 줄줄이 태어난 어린 자식들을 부양하고 돌봤다. 둘만의 방은커녕 몸 편히 쉴 공간이 없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조금씩 공간을 넓혀가면서 아빠는 서재를 갖게 되고 엄마는 새 집 주방의 긴 테이블에서 책을 읽거나 일기를 썼다. 그러다 회사를 진득하게 못 다니는 첫째 딸이 작은 원룸으로 독립 하고 둘째 딸은 결혼으로, 막둥이 아들은 경기 인근으로 직장을 다니게 되면서 비로소 홀가분하게 두 사람만을 위한 공간에서 오붓이 여생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을 시작했다.

     

“엄마는 너희 뒤치다꺼리 지겨워. 너희 아빠랑 둘만 살면 세상 걱정이 없어!~”     


뒤치다꺼리, 엄마는 늘 뒷바라지라는 고상한 표현보다 이 표현을 잘 썼다. 어느 엄마가 밥을 많이 안 했겠냐마는 우리 엄마는 결혼을 시작으로 정말 많은 ‘밥’을 지었다. 고혈압인 할아버지는 고기반찬이 귀한 시대에도 고기가 없으면 식사를 안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고모들이 벗어 놓은 속옷 빨래며 공무원 준비를 하는 막내 시동생을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 도시락을 싸주었다. 엄마의 젊음은 가족 뒤치다꺼리를 하는 시간으로 흘러갔다. 아빠는 어떠했는가? 3교대 타이어 공장에서 일하고 조금 돈을 더 벌어보겠다고 먼 부산으로 내려가 석조현장에서 돌을 쪼개는 일을 하셨고 50이 훌쩍 넘은 나이에 젊은 사람도 힘들다는 공인중개사 고시에 도전해 합격증을 손에 쥐셨다.

      

나는 독립 후 부모님 집에 잘 가지 않았다. 나만의 공간이 있어서 신났고 부모님의 간섭과 통제에 벗어나 마냥 기뻤다. 그러나 곧 손가락만한 큰 바퀴벌레와 견딜 수 없는 생활 소음, 실내 담배냄새, 와이파이가 제대로 되지 않은 환경으로 바사삭! 독립에의 환상이 깨졌다. 고민 끝에 좀 더 나은 주거 환경을 위해 서울 외곽의 투룸으로 이사 갔지만 밤이 되면 느껴지는 산 밑의 고즈넉함은 무서움으로 다가왔다. 당시 여러 스트레스와 고립감 등으로 스스로를 잘 돌보지 못한 탓으로 우울과 번아웃, 공황장애로 몸과 마음이 아팠다.

     

뒤늦게 엄마, 아빠 집으로 미친 듯이 돌아가고 싶었다. 집이란 자고 일어나면 따뜻한 밥이 있고 윤이 나야 당연한 거고 빨래는 언제나 뽀송하게 개켜져 있는 줄 아는 철부지 중의 철부지였다. 그제야 가족들을 위한 엄마의 살뜰한 보살핌이 얼마나 힘이 들었었는지 왜 엄마가 가족들의 뒤치다꺼리라고 했는지 그게 엄마의 고단함을 의미하는 단어였는지를 깨달았다. 부모님은 내 집에 와서 어수선한 실내며 싱크대에서 서서 밥 먹는 나를 보며 집에 가자고 손을 끌었다. 그래서 어렵게 한 독립을 포기하고 아이처럼 부모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가끔 다시 나가라 돈 되는 일을 해라 나를 타박하지만 예전처럼 아옹다옹하지 않고 서로를 이해해 가며 지내던 어느 날 여동생이 짐 가방을 들고 어린 두 조카와 집에 왔다. 잘 살았으면 좋겠고 그게 가족의 바람이지만 그렇게 됐다. 엄마와 아빠의 낯빛은 금세 어두워졌다.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래서 동생과 말다툼을 했지만 그게 어디 부모마음과 비교가 될 일인가?

    

일은 그렇게 됐지만 생활은 계속되어야 하지 않는가? 막내 동생이 집에 오면 머무르는 방을 싹 정리하고 예전 여동생 집의 세간을 가져와야 했다. 부피가 크고 큰 책상과 아이들 옷장을 옮길 때는 사촌과 그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옮겼다. 그리고 부피가 작은 옷가지며 아이들 장난감 등은 여동생과 내가 몇 차례 옮겨야 했다. 이미 있는 식구들이나 어린 아이들이나 사람, 환경, 생활방식의 차이를 인정하며 적응해 가야 했다.      

조카들이 아직 어려 뭘 제대로 몰라서 다행이지만 가끔 예전 생활에 대해 말을 할 때면 머라고 대꾸해야 할 지 적잖이 당황스럽기도 하다. 그래도 다행 중에 다행인 건 시간이 지나자 해쓱하던 여동생의 얼굴에 살이 오르고 아이들 얼굴도 통통하다. 세 식구가 살았던 적적했던 공간에 푸른 새순 같이 아이들 웃음소리가 청아하게 울리고 참새처럼 짹짹거리는 말소리가 집을 채운다.  

   

부모님은 우리의 부모기 때문에 언제나 우리에게 퍼주고 또 퍼준다. 말은 더 이상 ‘너희들의 뒤치다꺼리’가 싫다 버겁다 하여도 자신들에게 애잔한 자식이라 품어주고 또 품어준다. 가끔 세상 어느 곳 어디라도 이렇게 안전하고 햇볕이 잘 드는 집이 있을까? 하고 감상에 젖는다. 이렇게 추운 겨울에 ‘부모라는 품’에 기대지 못했다면 원룸을 나온 나는 어디로 가서 방을 구했을까? 그리고 여동생은 아이들과 어느 집을 알아보러 갔을까 싶다.   

  

내리사랑에는 비교를 할 수 없겠지만 가장 먼저 그들의 자식이 되어 그들의 인생을 때론 멀게 때론 바로 코앞에서 볼 수 있어서 이렇게 감사의 말을 전하게 된다.  

   

“엄마 아빠 저도 동생도 돈 많이 벌고 좋은 일 만들어 꼭 엄마, 아빠 걱정 덜어 드릴게요!

그러면 두 분 평소 바람대로 오순도순 사세요. 짧게 지나간 신혼 다시 즐기세요.

두 분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이글은 2022년 2월에 좋은 생각 공모전에 냈던 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첫 번째 브런치 발행을 기억하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