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 4:44

소설집 여자들이 사는 도시 미공개 원고 중에서

by 강경아

수정은 감았던 두 눈을 뜬다. 탁상용 시계를 보니 4:44를 알리고 있다. 아 저 망할 444 배열의 연속. 일어나기엔 너무 이르고 다시 잠을 청하기에 애매한 시간이다. 며칠째 4:44분에 눈뜨고 있다. 낮에 일하다가도 시계를 보면 이상하게 4:44를 향해 있다.


저녁을 먹고 똑같은 패턴의 드라마를 보고 바로 잠들었다. 수정처럼 밤사이 3회 이상 잠을 설치는 사람도 수면 부족이라고 한다. 문득 불을 켜본다. 작은 원룸 안에 살아있는 생물체라고는 수정밖에 없다. 적막감에 괜스레 팔을 한번 휘휘 돌려본다.


이곳 원룸을 잘라서 단면 속을 들여다봤을 때 그 속의 사람들이 수정처럼 괜스레 이렇게 팔을 휘휘 돌려본다면 꽤 그로테스크한 풍경일 것이다. 얼마 전 수정은 앞집 고지서를 잘못 가져왔다. 잘못 가져온 걸 깨달은 건 이미 가스비를 앞집 가상계좌로 보낸 후였다. 도시가스 측에서는 다시 고지서를 만들어서 보내려면 시일이 걸리고, 또 납부 기간이 촉박하니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하긴 상담원에게 강짜를 부리기엔 그네들도 먹고살려고 하는 일이다.


앞집 문에 고지서와 다시 수정 계좌로 입금하라는 쪽지를 붙였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수정은 결국 낸 돈을 끌어와 자신의 가스비로 대체했다. 그 후에 앞집 남자에게 전화가 왔다. 사무적인 통화를 했지만, 오랜만에 듣는 남자의 음성에 더 관심이 갔다. 뒤에 사람이 오든가 말든가 열심히 흡연하며 가던 무심한 앞집 남자였지만 말이다.


이웃들은 바로 코앞에서 마주쳐도 투명인간처럼 쓱 무시하고 지나갔다. 각자의 문이 있듯이 고유의 삶을 침해당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그들의 얼굴에 서려있었다. 평온한 주중이 지나 주말 밤이라면 문 이곳저곳이 닫히고 열리는 소리가 분주해, 이곳이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곳임을 상기시킨다.


수정은 평일엔 일하고 주말은 거의 집에 있었다. 외롭다면 외롭고 고요한 나날이었다. 독립초기엔 사람과 술 마시고, 음식 해 먹고 그 뒤치다꺼리를 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노동이 되었다. 수정의 친구, 가족들 사정과 그 시시콜콜한 뒷얘기를 수십 번 이상 들었다. 돌림노래처럼 반복되는 일상은 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주는 지루한 활기보다는 수정의 귀는 차라니 무중력 같은 고요함을 원했다. 필요 이상의 힘을 쓰지 않고 수정의 노동력을 제공해 최소한 의식주에 해당하는 돈, 수정이 원하는 최소한이었다.


불금이다 해서 금요일 오후부터 들떠서 놀러 갈 궁리를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이상한 수정이었다. 주말에 백화점이라도 나갈라치면 반시간도 안 돼 머리가 아픈 수정이었다. 그래서 식료품도 전화로 배달하는 수정이었다. 가끔 오는 배달원이 혼자 사는 수정 어깨너머를 탐색하듯 봐도 불쾌할지언정 눈을 내리깔고 무심한 듯 굴었다. 직장 생활과 혼자만의 생활은 수정이 세운 원칙에 의해 톱니바퀴처럼 잘 움직여지고 있었다. 오류나 문제의 소지는 없는 불필요한 사람, 걱정거리, 얽힘을 철저하게 배제한 탓이니라. 가끔 본가에 의무감처럼 다니러 가도, 십 수년을 살았던 집이 더 불편했다. 독립한다고 했을 때도 수정아버지는 네가 잘 알아서 하겠지 하는 무신경한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수정은 맡은 바 일을 잘하는 직원이었으나, 한 가지 지적을 지속해서 받았다. 방긋방긋 잘 웃지 않는다는 것, 전화 목소리가 불친절하다는 것. 여직원이 사무실 꽃이라고 생각하는 꼰대들은 곳곳에 유령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수정은 나름 고집이 있는지라 늘 같은 얼굴, 같은 목소리로 방문객을 대하고 전화 업무를 했다. 그 외 경리 업무에서도 실수를 하지 않았으므로 회사서 내쳐질 일은 없었다.

조용하고 잡음 없는 인생,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요철 없는 매끄러운 직선의 삶을 원했다. 지금의 생활 언제까지 꾸려나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최대한 유지하고자 했다. 직장에서 여러 가지 목소리가 뒤섞인 사람들의 소음, 사생활 침해에 가까운 재미없는 농담, 성희롱에 가까운 무례한 언사를 대할 때면 욕지기가 올라오는 수정이었다.


혼자만의 완전한 시간은 집에 들어가는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퇴근길에서 듣는 음악 속이었다. 수정의 마음이 그야말로 순해지는 시간.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가사에 따라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보면, 지금 몸 싣고 있는 곳이 버스인지, 전철인지 실감 못 했다. 자질구레한 집안일이나 고지서 납부, 그리고 머릿속 껌처럼 남아있는 잡무 등은 화이트 암전되듯이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상상 속 수정은 늘 사랑받고, 행복해하고 많이 웃는 그런 여자가 되는 것이다. 수정은 어렸을 때부터 호기심이 많고 질문이 많았다. 그러나 수정이 하는 유치 찬란하고 사소한 질문들을 공들여 들어주고 대답해 줄 어른은 없었다. 그래서 수정은 궁금한 것이 있으면 책을 읽고 마음속으로 궁금증을 쌓아갔다. 그런 수정을 보고 속모를 아이, 웃지 않는 아이, 소극적인 아이라 어른들은 분류했다. 그들이 아는 어린이범주에 벗어났으니 이런 판단이 편하니 말이다. 그러나 싫은 건 입을 꾹 다문 채 온몸으로 거부하던 아이였다. 가족 사이에서도 별난 아이, 속을 알 수 없는 아이라 낙인찍히자. 수정은 애써 변명하지 않았다. 이해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친구를 사귈 때도 그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얘기만 했다. 수정이 좋아하는 것들을 얘기해 봤자. 이상한 눈빛을 보낼 것이니까.


20대를 남들이 보고 싶어 하는 모습으로 살자니 수정은 너무 답답했다. 그래서 시작된 온라인 채팅. 말이 통한다 싶으면 실제로 만남을 요청해 왔고 끈적이는 눈빛을 보이면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피했다. 수정은 메마른 슬픔을 느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이해받지 못할 것 같다는 공포. 사랑이라는 아득하고 먼 감정보다 이해의 감정이 더 절실한 수정이었다. 그러다 수정은 어떤 남자를 알게 되었다. 많은 말을 쏟아내 듯하는 남자가 아니었고, 무엇보다 그녀와 같은 뚱한 표정을 짓는 데칼코마니 같은 남자였다. 비로소 본래의 얼굴로 대할 수 있는 가까운 사람이 생긴 셈이다. 그 남자가 하는 말은 아무리 사소한 말이라도 집중케 하는 힘이 있었다.


그 남자로 하여금 수정은 수다쟁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가끔 노래 속 상상의 여자가 수정에게서 튀어나왔다. 그 어떤 이야기라도 다 털어놓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그 시간들이 즐거웠다. 3시간을 걷고도 도무지 헤어질 수 없어, 걷고 또 걷던 종로거리를, 그 시간들이 희미하게 새벽마다 떠오른다. 수정은 4:44분을 가리키는 탁상용 시계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와 헤어진 이후, 흐르지 않고 멈추는 시간 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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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초 미공개 원고를 담은 개정판이 나옴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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