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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ji Jan 06. 2023

바람이분다. 살아야겠다. -강신주, 지승호-

이 책을 읽고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삶 


티비에 나와 유명해지고 유명세를 타고 인기를 얻는 유명 인문학자들은 일단 의심하게 된다. 인문학, 철학이란 어느정도 비판적인 성향을 가질 수 밖에 없고, 많은 사람들이 듣기 싫은 말(=자신의 추한면을 직면하게 만드는 말)을 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대중의 인기를 끄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야의 학자들에게 더 끌리는 나에게 강신주 박사는 그리 관심끄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데 작년부터 종종 유투브에서 불교철학 강의를 하는 강신주 박사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마침 밀리의 서재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담아두었다가 최근에 완독을 했다. 


인터뷰집 한 권으로 누군가에 대해 다 알기는 어렵지만, 강신주 박사는 내가 편견을 가지고 생각하던 것과는 달리 자신의 철학을 우직하게 끌고가는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주 조금이지만 들뢰즈, 마르크스, 벤야민에 대한 기초지식을 가지고 읽어서 그런지 더 재미있고 공감가며 읽을 수 있었다.






우리 삶을 왜곡하고, 세상과 나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논의를 불교에서는 희론이라고 해요. 우리의 사유를 희롱해서 삶을 그릇된 길로 이끄는 논의라는 뜻이죠. 그래서 희론이 적멸해야 마음이 평안해지고,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거예요.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적 자아가 저한테 희론인 거예요. 자본주의는 좋게 말하면 개인주의, 나쁘게 말하면 이기주의를 조장해요. 그러니까 자본주의적 인간은 ‘이기적 개인’이라고 말할 수 있죠. 결국 이성은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 추구하고 불리한 것을 회피하는 능력이고, 합리성은 이익과 불리 혹은 쾌락과 고통 사이에서 이익이나 쾌락을 선택할 때 의미가 있는 개념이죠. 바로 이것을 체계화한 사람이 벤담이에요. 문제는 이기적 개인은 사랑과 연대의 가치를 알 수 없다는 점이죠. 사랑과 연대는 자발적 자기 희생을 요구해요. 사랑하는 사람이 배가 고프면, 우리는 자신의 배고픔을 견디며 자기 밥을 내주니까요. 분명 고통을 선택한 셈인데, 오히려 뿌듯한 마음이 들죠. 나의 배고픔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의 배고픔이 사라졌으니까요.



지금 노동자들이 아무리 농노보다 생활수준이 높아졌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생산이 아니라 특정 소수, 부르주아들이 원하는 생산을 하고 있잖아요.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들을 주인이라고 하고, 남이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들을 노예라고 불러요. 고전적 정의예요. 질적으로 보면 아직도 억압사회인 거죠. ‘소비사회’라는 논리로 자본주의가 발달해야 되기 때문에 노동계급한테 소비자의 위상을 주는 거예요. 월급을 주고 물건 만들고, 또 그 돈으로 소비하고, 이 과정이 계속 돌면서 계속 월급쟁이 생활을 하지만, 과거 농노보다는 경제 사정이 좋죠. 하지만 자기가 원하는 것을 못 하기는 마찬가지예요.



대기업들이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가 말한 ‘노마드nomade’도 가져다 쓰잖아요.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을 사용하면 자유롭게 이동이 가능하다면서 노마드라는 이름을 가져다 붙이는 거예요. 정착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땅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지주한테 휘둘릴 수밖에 없죠. 그런데 유목민은 누가 지배하려고 하면 다른 데로 떠나버리면 그만이잖아요. 그래서 들뢰즈가 유목민을 강조한 거예요. 노트북을 쓰면 데스크탑이 놓인 공간에 갇히지 않으니까 ‘디지털 유목민’이라고 하는 거죠. 그런데 어떻게 디지털 유목민이 들뢰즈가 말한 유목민이겠어요. 노트북이든 스마트폰이든 거기에 펼쳐지는 인터넷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자유로운 사람들이겠어요.



자기 자신을 위대하게 보지 않으면 돼요. 스스로 배워야 되고, 세상에 대해서 평가 내리고 생각한 대로 떠들고 다니지 말아야 되고, 자신이 항상 작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돼요. 그 태도만 유지하면 돼요. 그리고 노동하는 사람을 존중하고 고맙게 여기는 태도는 기본이고요. 벽돌을 올리는 사람의 힘 자체가 얼마나 센 것인지를 알아야 해요. 이삿짐 나르는 사람을 돈 주고 부릴 수 있지만, 그 사람들이 없다면 이사를 할 수 있겠어요? 고마워하고 미안해해야 하는 거죠. 우리는 냉장고 하나도 혼자서 못 들어요. 다른 사람들의 노동으로 내가 살아가고 있구나, 착취하는 구조에서 내가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자각이 있어야죠. ‘고생하셨어요’라는 따뜻한 말 한마디 할 수 있는 감수성이 있어야 돼요. 내가 돈을 주고 배달을 시키니까 저 사람들이 월급을 받는 거 아니냐고 하면 답이 없는 거죠. 아무리 돈 가진 사람, 땅 가진 사람이 편하게 살 수 있는 사회라고 해도 일하는 사람들의 가치를 부정하면 안 돼요. 나한테 돈을 그만큼 준다고 해도 절대로 해내지 못할 일인데, 그분들이 대신 해주잖아요. 우리가 수치스러운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자기가 그렇게 살지는 않는다고 해도 수치스러움을 아는 게 중요한 거죠. 지금 사회를 정당화하거나 합리화하지 말고요. 그러면 조금씩 나아지지 않을까요? 사유가 바뀐다는 건 그 사유라는 색안경이 바뀐다는 거잖아요. 그래야 다른 사유를 구축할 수가 있거든요. 그런데 사유가 통념적으로 부르주아 체제에서 나오는 담론들, 엘리트적 담론으로 무장되면 모든 것을 시장의 논리로 너무나 당연히 정당화해버려요. 이러면 사회는 변하지 않겠죠.



자본주의는 공동체에서 쪼개진 개개인들이 생계를 걸고 참여하는 게임 같은 거예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보고요. 누군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필요를 만들 수 있는지를 분석해서 신제품을 만드는 것이 자본의 논리니까요.


전문가, 혹은 특정 스펙으로 취업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진보적으로 보여도 자신이 속한 체제에 대해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고요. 자신이 부품으로 들어가 있는 기계가 망가지면 자신도 버려진다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MZ세대도 자본주의 체제에 상당히 보수적이에요. 스마트폰이 외장형 심장이 되어버렸기에, 그들은 스마트폰으로 작동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저항하기 힘들어요. 저항하기는커녕 그들은 자본주의적 합리성에 따라 움직이죠.



철학자는 대개 특정 사회나 특정 시대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죠. 익숙한 삶 혹은 잘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삶을 뒤흔드니까요. 그래서 철학은 사유를 비판하는 특징이 있어요. 생각들을 진단하고, 잘못된 생각을 폭로해야 되는 거예요. 당신 생각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생각을 상대화한다고 할까요. 당대에는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던 중세시대의 기독교 사회, 유학 사회도 있었잖아요. 역사가 흐르면 그 상대적인 것이 밝혀지기도 하고, 다른 지역이나 문화로 가면 당신들 생각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억압체제는 말해요. 참여하기 싫으면 경쟁에 참여하지 말라고요. 그건 너의 자유라고요. 이것이 자본주의 체제가 가진 전대미문의 간교함이죠.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에 팔지 않으면 살 수 없도록 만들어놓고 노동력을 팔지 안 팔지는 너희들의 자유라고 궤변을 늘어놓으니까요.

 


최악은 세상이 막연히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두 번째는 절망하는 거고,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분노하고 바꿔버리는 거예요



자유주의 정책의 핵심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건 모든 노동계급이 자신을 ‘노동자’이기보다는 ‘작은 자본가’라고 오인하도록 하는 데 있어요. 소액이나마 투자를 하도록 유도하고, 작은 집이나마 임대 사업이나 투기를 하도록 장려하는 거예요



불행하게도 ‘작은 자본가’라는 생각은 일종의 환각일 뿐이에요. 투자나 투기에 사용되는 돈은 모두 노동력을 팔아서 생겨요. 결국 ‘작은 자본가’는 자본주의 논리를 받아들인 노동자에 지나지 않죠. ‘자본가’라는 형식을 없애서 불로소득이 사라진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노동자가 ‘큰 자본가’를 꿈꾼다면, 자본과 노동이라는 위계질서는 사라질 수 없어요. 이렇게 ‘작은 자본가’라는 인식은 노동계급에게 치명적이에요. 제가 누누이 강조했던 벤담적 자아, 혹은 이기적 개인이 노동계급의 세계 인식과 저항 의식을 그야말로 고사시키고 있기 때문이죠. ‘작은 자본가’가 어떻게 자신의 롤모델인 ‘큰 자본가’를 부정하겠어요. 당연히 자본가는 노동자를 부리기 쉽고, 자본은 노동에 대해 확고한 우위를 점유하게 되죠.



노예와 노동자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극단적으로 말해서 출퇴근 노예가 노동자 아닐까요? 이것이 사실 직장인은 모두 느끼고 있는 현실이죠. 아침에 출근할 때는 마음이 무겁고, 퇴근할 때는 마음이 편하잖아요. 그게 정확한 거예요. 물론 노예제에서보다는 잘살 수도 있지만, 자기가 원하는 일을 못 하기는 마찬가지예요



노동자들은 어떤 자본가에게 자기 노동력을 팔 것인지 결정할 자유밖에 없어요. 그건 자유가 아니죠. 노동력을 팔지 않으면 굶어죽는 사회에서 그게 어떻게 자유예요.



좋은 사회는 별게 아니라 생계에 걱정이 없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아야 돼요. 그런데 생계가 걱정이 되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잖아요. 지금 우리 사회가 그래요. 이런 사회일수록 인권을 많이 얘기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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