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고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책을 읽은 후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해서 찾아본 블로그에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는 이 문장에 괜시리 딴지를 걸고 싶었다. “우리가 정말 민주적인 사회에서 내 의지대로 감시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 믿고 있나요?”라고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조지오웰은 인간의 자유로운 의식이 사라진 세계를 아주 음침하게 그리고 있다. 신과도 같은 권위를 가진 커다란 절대권력 빅브라더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그 어떤 사적인 생각, 감정, 느낌도 들어설 자리가 없다.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말살당하는데, 이중사고, 신어와 같이 교묘한 세뇌작업은 물론이고 텔레스크린, 스피커, 사상경찰, 밀고와 같은 다양한 방법이 사용된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조지오웰이 묘사한 소설 속 세계와는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인다. 유투브,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는 누구나 창작자가 되어 자신의 의견을 낼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고, 권력은 점점 분산화 되는 것처럼 보여지기도 하니까. 하지만 한 꺼풀 벗고 들어가 보면 조지오웰이 예상한 세계는 우리 눈앞에 그대로 펼쳐져있다. 오웰은 소수의 독재자가 절대적인 권력으로 사람들의 사상을 지배하고 자유를 말살시켰던 것을 걱정했다면, 지금 우리 사회는 훨씬 더 교묘한 방식으로 우리의 사고를 지배한다. 사람들은 이제 자발적으로 자신의 프라이버시와 편리함 혹은 명성을 교환한다. 너무 많은 정보의 늪에서 사람들은 정작 중요한 것에는 신경조차 쓰지 못하고, 변죽만 울린다.
무엇보다 이중사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1984의 빅브라더처럼 사상범을 잡아다 고문을 시키거나 어렵사리 세뇌시키지 않아도 사람들이 스스로 알아서 이중사고를 하도록 만든다.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을 좋아하는 친절한 사장은 더 많은 이윤을 위해 아프리카 혹은 인도 어딘가의 어린아이를 착취한다. 이런 모순은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작동하기에 우리는 큰 불편함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모순된 역할을 별다른 어려움 없이 수행해나간다. 1984의 세상에서 고통 속에 이루어진 모든 것들이, 2022년을 살고 있는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별다른 고통 없이, 아니 오히려 기쁨과 만족으로 해낼 수 있다.
이 책을 모두 읽고 리베카 솔닛의 오웰의 장미를 펼쳐 그녀가 1984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다시 한 번 읽어본다. 처음 읽을 때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녀는 이 어둡게만 느껴진 디스토피아적 소설에서, 그럼에도 불고하고 오웰이 곳곳에 흘려 놓은 생명력과 삶의 긍정성을 발견해낸다. 윈스턴은 결국 굴복당한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시도했고, 그 시도는 그를 파멸로 이끌었지만, 그는 자신이 살 수 있는 최선의 삶을 살았다. 어쩌면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노인과 바다의 이 문구가 머릿속에 맴돈다.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