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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ji May 09. 2023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나만의 대답

다소 정신없고 맥락없음 주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란 우리가 살면서 마주할 수 밖에 없는 질문이다.  과거를 살다간 수많은 현자들이 자신만의 답을 내어놓았지만 그들이 사는 세상과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다르고, 그들의 기질과 우리의 기질은 다르기에 우리는 결국 자신만의 답을 찾는 탐구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현대인은 인공지능과, 유전공학의 발달로 인해 인간은 더 커다란 질문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인간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인간 문명은 발달을 거듭하며 수 많은 것들을 발명해냈다. 돌맹이를 깎아 만든 주먹도끼에서 시작된 도구에 대한 인간의 갈망은 산업혁명을 통해 폭발했다. 인간은 우주에 갈 수 있는 우주선을 만들고, 전세계 어디든 바로 연결될 수 있는 초고속 통신망을 만들어 냈고, 엄청난 에너지를 생성해내는 핵분열을 성공시켰다. 하지만 이 모든 문명의 발달은 인간의 존재 그 자체를 위협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존재의 바깥영역에서 이루어진 발명이었다. 이들은 인간의 존재와 존재방식을 위협하는 도구가 될 수는 있었지만, 인간 존재가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을 불러오지는 않았다.  


인공지능은 인간에게 새로운 숙제를 던져준다. 우리는 이것을 고도로 발달된 기술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의식을 가진 존재로 바라봐야 하는가? 혹은 의식을 가진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은 중간자적 무언가로 바라봐야 하는가? 과학적, 철학적, 생물학적 논쟁거리와 고민이 가득한 이 질문은 수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킨다. 만약 의식이라는 것이 뇌의 생화학적 반응에 대한 작용이라고 한정한다면, 우리는 근 미래에 인공지능을 의식으로 보지 말아야 할 타당할 이유를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임사체험이나 의식 혹은 영혼에 대한 수 많은 이야기들은 인간의 의식이란 단순히 생화학적 반응 그 이상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직 인간의 의식은 인간은 인간에게 한정된 것이며, 인간의 존재는 그 자체로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는 기존의 명제는 지속가능하다. 인공지능이 인간에 비해 얼마나 더 효율적이고 생산적인지, 창의적 일 수 있는지와는 별개로 인간 존재는 존재 그 자체로서의 가치를 지속할 수 있다. 


다음으로 생각해볼 문제는 '죽음'에 대한 문제이다. 죽음은 인간의 삶에 유한함이라는 시간적 한계를 부여해준다. 죽음을 통해 인간은 아무리 필사적으로 노력해도 피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마주한다. 에고에 의한 삶이란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 진실된 내면의 나를 발견함으로 유한한 삶을 진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의미있게 살아가야 한다는 절박함을 마주한다. 하지만 죽음의 종말은 이 모든 것을 무력화 시킬 수 있는 강렬한 씨앗을 가지고 있다. 죽음이 없는 영생의 삶,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 시간이라는 유한함을 빼앗아가버린다. 존재는 시간을 통해서만 진실로 존재할 수 있는데, 시간이 없는 존재란 어떤 의미일까? 시간이 빠진 삶에서 우리는 의미를 찾을 필요성을 느낄 수 있을까? 일부 급진적인 기술론자들은 의식을 업로드 함으로 영원히 죽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만약 우리의 의식이 뇌의 생화학적 기능에 의한 것이고 그것이 전부라면, 우리의 의식은 영생을 얻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의식은 단순한 생화학적 작용 그 이상이라고 생각한다.(그리고 믿는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반과학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임사체험과 영혼에 대한 수많은 연구결과과 에너지의 존재, 양자영학의 발견은 인간의 의식을 단순한 화학작용으로 보는 것의 한계를 이야기해준다. 여전히 과학적 근거가 부실하다 해도 어쩔수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에는 일정부분 믿음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종의 한 개체로서 존재하는 나는, 나라는 존재가 단순한 생화학작용 그 이상이라고 믿고 싶고, 이 믿음이 내 삶을 좀 더 의미있게 해주는 데 도움을 주고 이 믿음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증거들이 있는 이상, 나는 철저한 유물론자의 관점에서 벗어나서 신비주의적이고 영적인 관점에서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그리고 삶을 바라보고 싶다. 


그래서 내가 삶을 바라보는 관점은 다소 신비주의적인 관점을 포괄하며, 영적이고, 정신적인 측면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방식은 이러한 나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 그럼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 것인가? 


꽤 오랫동안 내 마음을 끄는 삶의 방식은 소박하고 간소한 삶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다. 나는 이런 종류의 삶의 방식에 아주 오래전부터 마음이 끌렸고, 삶에서 간결함과 소박함을 추구했을 때 가장 큰 만족을 느낀다. 이 방식의 삶만이 유일한 정답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지금까지 시도했던 다양한 삶의 방식들 중 가장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방식이 바로 소박하고 단순한 삶의 방식이었다. 


소박한 삶의 방식을 추구하지만 나는 대부분의 소박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러다이트 운동이나 기술문명에 대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이건 실리콘밸리 기반 테크회사에서 꽤 오랬동안 근무하며 브레인워시 당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실제로 내 삶이 기술의 발달로 인해 훨씬 더 편해졌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로봇청소가기 있어서 청소가 간편해지고, 건조기 덕분에 장마철에도 뽀송뽀송한 수건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 김치냉장고 덕분에 언제든 맛있는 김치를 먹을 수 있고, 비닐하우스 덕분에 한 겨울에도 맛있는 야채를 먹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 스마트폰은 집중력을 앗아갔지만 엄청난 편리함을 함께 가져다주기도 했다. 앞으로는 태양열 발전과 전기자동차와 자율주행의 혜택도 누리고 싶다. 물론 이 모든 것에는 어두운 면이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고, 그 어두운 부분이 우리 삶을 이전보다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 또한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렇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잘못되었어! 우리는 과거로 되돌아 가야해, 그것이 옳은 길이야. 라고는 쉽사리 단정짓지 못하겠다. 긍정성을 강조하기 위해 모든 부정성을 덮어버리는 방식으로 부정성을 강조하기 위해 모든 긍정성을 덮어버리는 방식으로는 진정한 변화를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성장을 최우선순위로 하며, 계속해서 성장하는 것 말고는 출구가 없는 듯 보이는 현재의 경제성장 방식에 대해서는 큰 회의를 가지고 있다. 혁신으로 만들어진 성장이 아니라 성장을 위한 성장이 너무 많고 이는 지구는 물론이고 인간 의식에 전혀 좋은 영향을 주지 않는다. 문제는 성장을 위한 성장이 이제는 너무 익숙해진 개념이고 피할 수 없는 선택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린인의 저자 쉐릴 샌드버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계속 성장해야 한다. 왜냐면 성장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것이 스타트업의 현실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말을 들었을 당시의 나는 계속해서 실속 없는 성장만을 요구하는 회사의 방침에 의문을 제기하던 시점이었는데 쉐릴의 저 말을 듣고는 금세 성장논리에 수긍해버렸다. 당시의 나는 성장 없이 도태되는 것이란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무비판적 수긍이었는데, 돌이켜보면 도태되는 것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깊이 깔린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양적으로 성장하는 것만이 성장이라 세뇌당했다. 질적인 성장, 성숙, 무르익음과 같은 가치들은 양적 성장이 함께하지 않는다면 모두 쓰잘데기 없는 것 혹은 변명으로 치부되었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것일까? 정말 양적인 성장 이외의 다른 모든 성장은 의미없는 것일까? 


양적인 성장이 가져다주는 가장 큰 효용은 저렴한 비용으로 자본을 조달할 수 있다는 것인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만큼 더 매력적인 혜택은 없다. 그래서 모든 기업은 성장에 목을 맨다. 처음에는 혁신에 의해 성장했던 기업은 어느 순간 한계에 부딪히고 직원들을 쥐어짜내고 영업을 하고 마케팅을 하며 성장을 만들어 낸다. 이를 통해 조달된 저렴한 자본은 또 다른 혁신을 만드는 데 사용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회사의 주주들, 스톡옵션이나 주식이 있는, 업무 대비 높은 연봉을 받는 소수의 직원들에게 돌아간다. 물론 일부는 혁신으로 흘러가지만 대부분의 경우 진정한 혁신이라기 보다는 실질적인 필요는 별로 없는, 불필요한 욕구를 만들어 냄으로써 억지 성장을 견인하는 불필요한 기술의 부산물이 만들어 질 뿐이다. 그러니까, 기업의 성장하고자 하는 본성은 특정 임계점을 지나면 진정한 성장 보다는 불건전한 성장을 가져오고, 이는 곧 환경오염과 과소비로 연결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를 견인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된다. 


자본주의의 특성은 모든 것들을 돈이라는 하나의 공통점 아래 연결시켜버린다는 것인데, 돈이라는 연결고리아래 이 모든 것들이 혼돈속에 얽기설기 엮여 있다. 이런 복잡성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 좋은 것이고 무엇이 나쁜것인지에 대한 확실한 기준을 제시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어디까지가 필요이고 어디부터가 욕망인가, 어디까지가 혁신이고 어디부터가 도태인가. 경계선을 자리는 것은 어렵지만 비교적 명료한 것을 발라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나에게 있어 명료한것은 욕망하지 않았던 것을 욕망하게 만들고 그것을 대량생산함으로써 돈을 버는 행위는 대부분 그다지 건강해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우리 기술은 우리가 충분히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모든 편리한 것들을 만들어 놓았다. 또 한가지 명료한 것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욕심은 끝없이 이어질 것이고 우리의 결핍은 결코 채워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가장 풍요로운 시대에 살면서 가장 빈곤한 정신을 가지는 것 또한 가능한 일이며, 모든 것을 다 가지고도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것처럼 박탈감을 느끼는 것 또한 가능하다.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졌고, 그렇게 자라났고, 그렇게 세뇌당했으니까. 


상상해본다. 금세 버려지고 대체될 새로운 제품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그것을 소비하게끔 욕망을 만들어 내는 세상을, 그 세상을 우리는 정말 진보된 세상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나는 다른 세상을 상상해본다. 우리가 무의식에 맡겨버린 우리의 의식을 찾아온 세상을. 내가 필요한 것을 알뜰하게 소비하고, 필요없는 것에 쏟는 시간을 줄이며 정말 필요한 것에 정성을 쏟으며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그런 세상에서 우리는 진정한 문명 발전의 이기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세탁기와 청소기는 우리를 가사노동에서 해방시킬 것이고, 자동차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언제든 여행할 수 있다. 핸드폰은  멀리있는 누군가의 소식을 듣고, 필요한 정보를 얻으며, 원하는 순간을 간직할 수 있는 사진을 찍고, 필요한 일을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용도로 사용될 것이다. 우리는 충분한 여가시간을 누리며 충분히 자고, 건강한 음식을 먹으며, 삶을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러한 소박하고 단순한 삶의 방식 말고 다른 삶을 방식이 우리의 영혼을 몸을 마음을 충만하게 해줄 수 있는 다른 삶의 방식을 찾지 못하겠다. (적어도 나의 우주에서는 그렇다.) 


나라는 인간은 모든 것을 보편적인 관점에서 해석해버리는 습관/성향이 있는데, 그래서 어떤 방식이든 나라는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만큼이나 인류전체, 지구 전체, 우주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같이 생각해보게 된다. 그래서 뭐든 명료하게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다. 인간의 관점에서 좋은 것이 우주적 관점에서는 해악이 될 수도 있고 우주적 관점에서는 별 것 아닌 일이 인간의 관점에서는 대 재앙으로 여겨질 수도 있으니 참으로 복잡할 노릇이다. 여기에 모든 것에 하나의 답을 내려고 하는 이분법적인 성향과 완벽주의까지 겹치면 정말 답이 없다. 결국 그 모든 것에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이도저도 아닌 채로 고민만 하게 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옳고 그른 하나의 정답이 있다는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알아차리다보면 내가 삶의 방향을 접근하는 방식에서도 하나의 절대적 옳음을 추구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개인적 삶에서는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이 엄청난 우주적 관점에서 절대적인 가치판단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최대한 다원적인 관점을 취하는 것이 도움이 되지만 이 또한 임시방편일 뿐이다. 이것도 저것도 모두 맞다는 관점으로는 온전한 정신으로 삶을 살아가기 어렵다. 


나만의 어떤 곤조를 가지되 적절한 유연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가장 건강한 정신상태로 우리를 살아가게 도와준다고 믿는다. 곤조가 없으면 이도저도 없는 혼돈지옥에 빠지게 되고, 자칫 곤조만 강조하면 삶이 경직되버린다. 


나는 인간이 가지고있는 경이로움, 신비함, 영적인 힘을 믿는다. 하지만 나는 인간만이 우주에서 유일하고 가치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간이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 이 세상 모든 것에는 에너지가 깃들어 있다고 믿기에 모든 생명과 무생물 역시 소중하다. 이 관점은 생태주의적인 관점과도 맥을 같이한다. 하지만 생태주의자들 대부분이 기술발달을 부정하는 것과는 다르게 나는 기술발달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모두 인정하고자 한다. 기술의 종류에 따라 어떤 것는 장점이 더 두드러지고 또 어떤 것은 단점이 더 두드러진다. 나는 적어도 나의 삶에서 이것을 의식적으로 선택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사회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의식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기를 격려하고 응원하며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 선택을 돕고 싶다. 


나는 또한 물질적인 면만큼이나 정신적인면을 중요하게 여긴다. 사실 지금은 정신적인 것에 더 초점이 맞춰져있다고도 볼 수 있는데 이는 내가 의식주를 해결하는 정도의 물질적 부분에 있어서는 어느정도 안정적인 느낌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물질의 축적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더 많이' 와 '이정도면 충분해' 에서 '이정도면 충분해' 버튼을 누른 케이스인데, 그래서인지 나는 더이상 물질적인 것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발적 가난함을 추구할 정도로 물질적인 것에 대해 덜 중요시 여기는 것은 아니다. 나는 소박하고 자족한 풍족한 자족적인 삶을 추구하며, 하나를 소비해도 좋은 품질의 것을 선택하고 싶고, 돈 때문에 아쉬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풍족함을 꾸준히 누릴 수 있기를 희망한다. 지금 내 계획대로 흘러간다면 내가 영생을 얻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그 정도 풍요로움을 쭉 누리고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드는데, 이 확신은 내가 물질적인 것들로부터 오히려 덜 관심을 가지게 도와주고, 정신적인 것들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안전판의 역할을 해준다. 이런 안정감을 누릴 수 있다는 건 어떤 의미로는 굉장한 특권이라 여겨진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내가 추구하고 지향하는 것들이 옳다고 이야기하는 것에 어떤 모순을 느끼기도 하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산다면 디플레이션이 발생해서 세계 대공황이 오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는 모든 것을 경제 논리로만 해석하려고 하는 관점과 맥을 같이 한다. 대공황은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참혹한 시기였지만 오히려 이 시기에 공동체 의식이 생기고 삶을 의식적으로 살기 시작했다고 이야기 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충격은 때때로 우리가 일상적인 상황에서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많은 급진적인 선택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촉매제가 되기도 한다. 


글이 엄청 길어졌는데, 무엇이든 전체적인 것을 퉁치고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법칙을 고르려고 하면 세상 복잡해지고 설명이 안되고 세상은 온통 모순덩어리로 보인다. 그러니 내가 살아가는 삶의 철학은 분명히 세워야겠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진리라 생각하며 남을 훈계하거나 그 방식으로 세상의 모든 것들을 해석하려고 해서도 안되고, 나만이 정답을 알고 있다는 식으로 자만감에 휩싸일 필요도 없다. 나는 내가 가장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을 택한 것 뿐이고, 그것이 다양한 방식으로 이 세상에 기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면서도 내가 생각할 때 부정적인 영향을 좀 더 많이 가져올 것이라 여겨지는 확실한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에 대해서는 확실히 의사표현을 하며 내가 할 수 있는 변화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한 가지 관점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고자하면 곧 전체주의적인 사고에 물들어서 편협한 관점으로 세상을 해석할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머리속이 좀 복잡했는데 이렇게 글로 한바탕 의식의 흐름에 따라 정리하니까 좀 정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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