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정상이라고 여기는 것들도 한 때는 비정상이었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투표를 할 수 있게 된 지 이제 고작 백 년 남짓 되었고, 흑인이 백인과 같은 학교를 다니고,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은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게 된 지 고작 60년이 지났다. 아무리 보수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해도 여성의 선거권과 인종분리정책 철폐가 국가의 안전을 헤치는 극단적인 행위이며 우리는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지난 세기 동안 우리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보편적인 동의를 이루어 냈다.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이 특별히 몰상식적이고, 도덕성이 낮으며, 착취적이었기 때문에 여성 차별, 노예 제도, 흑인차별과 같은 것들을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들은 모두가 당연하게 믿고 있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의문을 제시하는 것에 대해 익숙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크다. 우리는 무엇이 진실인지 스스로 생각하고 확인하는 것보다 다수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옳다고 믿으며 살아가게끔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의문을 제기하는 것보단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편하다. 역사적으로도 의문을 제기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무시당하거나, 억압당하거나, 처형당했다. 하지만 결국 세상을 바꾸고 인류의 의식을 한 단계 나아가게 만든 주체는 의문을 제시한 사람들이었다. 평범한 흑인여성 로자 파크스는 유난히 피곤했던 그날, 왜 흑인은 좌석에 앉을 수 없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리고 그 작은 결정은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2200년 정도 되었을 때, 그 시대를 살아가고 있을 미래 인류는 지금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게 될까 생각해 본다. 인간이 느낄 맛의 쾌락을 위해 수많은 동물들이 기계처럼 사육되고 도축되는 것을 대다수의 인간이 괜찮다고 여겼다는 것을, 스트레스받는 날이나 축구 경기와 같이 특별한 이벤트가 열리는 날 공장식으로 사육되고 도축된 치킨 한 마리와 맥주 한 캔을 먹는 것이 나를 위한 작은 사치로 마케팅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 행동을 통해 행복을 느꼈다는 사실을 미래 인류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매년 경제 성장을 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늘 더 많은 소비를 해야 하고, 그래서 눈에 보이는 환경 파괴와 늘어나는 쓰레기 더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국가와 기업과 개인이 합심해서 더 많은 돈을 찍어내고, 더 많은 것들을 생산하고, 더 많은 것을 소비하는 것이 너무 당연했다는 것을, 그리하여 소비는 미덕이자 자랑이 되었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렇게 소비한 것들 중 대다수는 곧장 버려지거나 사용되지 않은 채 어딘가에 처박혀 있었다는 사실을 미래 인류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로 동일 노동을 하고 다른 임금을 받는다는 사실에 대해, 기업의 대표나 임원이 일반 직원에 비해 수백 배의 임금을 받는 것을 모두가 당연하게 여긴다는 사실에 대해, 어떤 지역의 부동산을 미리 소유해서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로 인해 막대한 시세차익을 거둘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부의 격차가 엄청나게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 너무 당연했고 그래서 모두가 부동산 공부에 목을 매었다는 사실을, 미래의 인류는 어떻게 해석하고 바라볼까?
나 역시 자본주의 사회의 하나의 인간으로 적당히 세뇌당하고,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투자하고, 적당히 착취하고 착취당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과연 지금 우리가 정상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진짜 정상인지에 대해서 때때로 의문이 든다. 근데 이런 생각을 계속하다 보면 자꾸만 나 자신의 모순을 만나게 되니 자꾸 생각을 멈추고 눈을 감아버리려고 한다. 요즘은 행동이 생각을 따라가지 못해도, 그래서 어느 정도 모순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는 없어도 생각하는 것에 대해 의문이 드는 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오늘도 주저리주저리 글을 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