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산책 단상
1. 오랜만에 산책을 했다. 처음에는 최진석 교수님의 유투브를 듣다가, 오늘 하루 무언가에 대해서 깊이 사유한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남의 이야기 대신 내 머릿속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2. 파우스트의 마지막 구절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가 떠올랐다. 고등학교 시절 우연히 이 문구를 만나 엄청난 위안을 받았다. 돌이켜보면 당시에는 '노력'보다는 '방황'이라는 단어에 안도하고 위안받았다. 내가 방황하는 이유는 알고보면 내가 노력해서일지도 몰라, 그리고 파우스트 같이 대단한 사람도 방황하잖아. 그러니까 나 같이 아무것도 아닌 학생 나부랭이가 방황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야. 라고 단편적으로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3. 살면서 힘에 부칠 때마다 저 문구를 떠올렸다. 때로는 억울하기도 했다. 왜 노력하는 인간은 방황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노력하는 것도 힘든데, 방황까지 해야한다니 좀 억울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냥 노력하지 않고 방황하지도 않는 삶을 사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4. 방황하지 않는 삶이란 무엇일까? 방황한다는 것은 예측의 범위를 벗어나 움직인다는 것이다. 방황하지 않는다는 것은 고여있거나 늘 예측가능한 방향으로 흐른다는 것이다. 고여있는 것은 썩는다. 같은 방향으로 흐르는 것은 맹목성에 빠져버린다. 고여있는 삶과 맹목적인 삶,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방황하는 삶 중에 택해야 한다면, 방황하는 삶을 택할 수 밖에... 이것이 인간의 숙명이라는 것일까?
5. 불교와 영성, 그리고 명상을 공부하며, 저 문장을 다시 들여다보니 문장에는 보이지 않은 새로운 단어가 보인다. 바로 욕망, 그리고 이분법적인 시선. 인간이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이유는 바로 욕망 때문이다. 그것도 양 극단의 욕망. 파우스트는 양극단의 욕망을 추구한다. 진리를 추구하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의 모든 쾌락과 경험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 무엇으로도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비단 파우스트만은 아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태어난 인간이라는 존재는 필연적으로 양극단의 욕망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니까.
6. 그런데, 꼭 하늘과 땅을 분리해서 봐야할까? 진리와 쾌락이 꼭 양 극단에 존재해야 하는 것일까? 이분법적인 세계관이 아니라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통합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안되는 걸까? 음에서 양이 나오고 양에서 음이 나오는 동양의 세계관처럼 말이지.
7.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왜냐면 노력의 뒤에는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다면 욕망 없는 순수한 노력이 가능하다면, 방황하지 않는 것 또한 가능하지 않을까?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생존을 위해 욕망을 가질 수 밖에는 없으니까. 하지만, 기본적인 생존의 욕구를 넘어섰을때, 수행을 통해 욕망 없이 그냥 좋으니까 노력하는 것도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때 노력하지만 방황하지 않는 인간이 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