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에너지레벨이 높은 편이다. 물론 가끔씩 방전되어 버릴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에너지레벨을 유지한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참 하고 싶은게 많은 사람이었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배우고 싶은 것도 많고, 보고 싶은 것도 많고, 가고 싶은 곳도 많고, 되고 싶은 것도 많고....
앞에서 과거형을 사용한 이유는, 그랬던 내가 이제는 더이상 무언가 하고 싶고 무언가 되고 싶다는 욕구를 예전만큼 강하게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그 무엇도 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이런 감정을 느끼는 나는 지금 매우 당.황.스.럽.다.
뭐든 빨리 질려버리는 나는, 다행히도 그게 무엇이든 쉽게 배운다. 그리고 무언가가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또 금새 권태를 느껴버린다. 그리고 권태를 느끼기도 전에 새로운 무언가에 다시 흥미를 갖고 같은 사이클을 반복한다. 그래서 나는 한편으로는 늘 쫓기듯 살아왔던 것 같다. 무언가가 익숙해질 때쯤이면 다시 새로운 무언가가 다가왔고 나는 자연스럽게 그 새로운 쪽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었다. 이런 과정들이 신나고 재미있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늘 어딘가의 가장자리에 몰려있는 기분이었다. 내가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금세 떨어져버리고 마는 가장자리의 끝.
그래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그 무엇도 되고 싶은 지금의 마음이 당황스럽고, 불안하고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당분간 가장자리로 나를 밀어넣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조금은 안심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지금의 나는 엄청난 낭떠러지의 가장자리를 위태롭게 걷고 있는 상태이긴 하다. 어쩌면 그래서 더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그 무엇도 되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 상황을 매니지 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야 하니까...)
이런 나의 마음의 변화가 일시적인 피로에 의한 번아웃 같은 것인지 아니면 나라는 사람이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는 것인지 아직은 잘 모르지만, 지금의 이 마음을 부정하지도 않고 긍정하지도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연습을 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왜 내가 이런마음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조금 더 찬찬히 들여다 보려고 한다.
모든 번뇌와 고통이 기대에서 오는 것임을 생각했을때 어쩌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그 무엇도 되고 싶지 않은 것은 어쩌면 번뇌와 고통을 덜어버릴 수 있는 지름길 일지도 모른다. (아님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