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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ji Oct 27. 2022

내 맘대로 살기

왜냐면 내 인생이니까. 

우리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사고하도록 길들여져 있다. 

지위와 부에 대한 사회적 가치판단은 늘 일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에 따라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며 끊임없이 달라지고 변해왔다. 그러니까, 결국 내가 하는 가치판단에 대한 생각들은 어느정도 사회적인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나는 그동안 좋은 삶이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꿈을 이룬 삶이라고 철썩같이 믿어왔는데, 이 또한 능력주의를 기반으로 한 사회적인 압력속에서 만들어진 가치관에 영향 받은 믿음이라는 걸 깨달았을때의 그 허무와 절망감이란..!! 

이 믿음을 깨고 나오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큰 용기와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데, 어떻게 사회적 신념이 만들어지고 변화해 왔는지 아는 것은 꽤나 도움이 된다.  


알랭드 보통의 책 불안에서는 어떻게 사회적 지위와 부에 대한 가치판단이 달라졌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한때 가난은 청빈함의 상징이었지만 18세기 중반부터 게으름의 소산, 무능함의 소산으로 연결되어져 버렸고 그와 동시에 부의 가치는 상승하게 되었다. 



맨드빌의 주장 - 부자들이 지출을 하기 때문에 그들 밑의 모든 사람이 고용되는 것이며, 따라서 부자야말로 사회에서 갖아 약한 사람들의 생존을 돕는다. 많이 소비하고 불필요한 것을 사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유익한 일을 하는 것이다. 수 많은 이웃에게 폐를 끼치면서 가장 불필요한 제품을 발명하는 사람이 옳든 그르든 사회에는 가장 좋은 친구다. 나라에서 허세와 사치를 일거에 추방해 버린다면, 포목상, 실내 장식업자, 재단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반년 안에 굶어죽을 것이다. 

흄의 주장, 사치론  - 사치품에 대한 요구가 없는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나태에 빠지고, 삶의 즐거움을 모두 잃어버리며, 결국 공중에게도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들은 함대와 군대를 유지하거나 먹여 살릴 수 없다. 


애덤 스미스, 국부론 - 부를 얻은 사람은 늘 그 전 만큼, 가끔은 그 전보다 더 큰 불안, 두려움, 슬픔에 사로잡힌다. 그는 쓸데 없는 물건이나 자질구레한 장신구를 쫓느라 평생을 보내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비꼬기도 한다. 그러나 스미스는 동시에 그런 사람이 많다는 점에 매우 감사한다. 문명 전체, 그리고 사회의 복지는 불필요한 자본을 축적하고 자신의 부를 자랑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망과 능력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능력과 세족적 지위 사이에 신뢰할 만한 관련이 있다는 믿음이 늘면서 돈에도 새로운 도덕적 가치가 부여되었다. 이전에는 부가 혈연과 연줄을 따라 내려갔고 이때 우리는 돈이 부자부모에게 태어났다는 것 외에 어떠한 미덕도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당연시되었다. 그러나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부가 품성의 지표로 여겨질 수도 있었다. 부자는 단지 더 부유할 뿐 아니라 더 낫다고도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19세기 특히 미국에서 많은 기독교 사상가들이 돈에 대한 견해를 바꾸었다. 미국에서는 신자들에게 세족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성공적인 삶을 살라고 요구한다. 

문제는, 성공을 거둔 사람이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면, 실패한 사람 역시 그럴 만해서 실패했다는 이야기도 성립하는가?이다. 이전에 가난한 사람들은 겪지 않았던 '수치심'의 문제를 경험하게 된다. 훌륭하고, 똑똑하고, 유능한데도 왜 여전히 가난한가 하는 문제는 능력주의 시대에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이 답을 해야 하는 더 모질고 괴로운 문제가 되었다. 

- 알랭드 보통, 불안 - 


그러니까, 나의 직업적 성공, 나의 지위, 나의 부와 나의 가치를 밀접하게 연결시키며 개인의 가치를 이러한 성취와 연결하기 시작한 것은 약 18세기 무렵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존경하는 많은 위인들은 부자이거나 지위가 높아서 존경받았다기 보다는 삶에 대한 태도와 철학, 그들이 가지고 있는 내적인 성품으로 존경받았다. 예수, 부처, 노자, 공자, 신사임당, 이순신, 니체, 쇼펜하우어, 칸트, 베토벤 등등등 이들은 부자도 아니었으며 특출나게 사회적 지위가 높은 인물들도 아니었다. 하지만 21세기 우리가 가장 존경하고 찬양하는 인물들을 살펴보자. 워렌버핏, 제프베조스, 빌게이츠, 일론 머스크, 스티브잡스, 손정의, 등등등 우리는 돈이 많은 순서대로 존경하고 닮고자 한다. 그들의 특출난 패기와 야망 혁신과 도전정신을 찬양한다. 그들이 대단하다는 건 물론 인정하지만, 우리가 누구를 존경하고 닮고싶어 하는지에 대한 가치판단은 시대에 따라 꾸준히 바뀌어 왔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가진 기질과 내가 태어난 시기 사회가 원하는 주파수는 어떻게 공명하는가? 

1. 내가 타고난 기질과 사회가 요구하는 성공의 트랜드가 잘 맞아 떨어진다. >> 아마도 1%정도 혹은 그 미만, 하지만 살면서 어느 한 시기 요 트랜드가 잘 맞아서 성공을 맛볼 수도 있다.

나에게 주어진 타고난 기질이 자신이 태어난 시대적 트랜드와 잘 맞아떨어진다면, 사회적인 성공과 동시에 개인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일론 머스크같은 인간. 나는 일론 머스크를 좋아한다.그가 가장 부자여서도, 세상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을 만들어서도 아니다. 나는 일론이 세계에서 제일 큰 부자이고 가장 혁신적인 기업을 만들었음에도 여전히 자신만의 또라이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좋다.  자기가 가진 기질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밀고 나가버리는 것. 그는 타고나기를 혁신적이고, 진취적이며, 목표지향적이다. 무엇보다 비상한 두뇌와 편집증적인 집착을 가지고 있기에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어서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크고 실제로도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만약 그게 1000년 전에 태어났다면 지금과 같은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2. 내가 타고난 기질따위 신경쓰지 않고, 사회가 요구하는 법칙에 나를 맞춘다. >> 대다수가 이렇게 살고 있다고 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타고난 기질을 무시하고 시대적 트랜드에 자기자신을 구겨 넣는다. 사회가 제시하는 정답이 자기가 원하는 삶이라 믿으며 그것을 얻기 위해 자신을 맞추고 맞추다 못해 갈아넣기 시작한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고 본다. 나 역시 여기에 속해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어느정도 발을 걸치고 있는 듯 하지만, 이렇게 살기 지긋지긋해서 이제는 여기에서 좀 빠져나오려고 한다. 그러니까 사회가 이야기하는 것 신경안쓰고 내 맘대로 살겠다는 거지. 


3. 타고난 나의 기질은 사회가 요구하는 성공의 트랜드와 맞지 않지만, 신경쓰지 않고 그냥 내 갈길 가면 산다. >> 나는 이 때 삶이 예술이 된다고 생각한다. 

어찌보면 가장 불운하지만 또 어찌보면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이렇게 사는 사람들 아닐까? 시대적 트랜드나 사회가 요구하는 바는 개나줘버리라고 하고, 그냥 마이웨이로 자기다운 삶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누군가에게는 이단아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루저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또라이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안다. 그렇게 사는 것만이 자신답게 살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물론 먹고 살아야 하기에 어느정도 타협을 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카테고리에 속하는 사람은 사회적 가치나 기준보다는 자기가 정한 가치나 기준이 훨씬 중요한 사람이다. 그래서 남의 말에 휩사리 흔들리지 않고, 그래서 고집불통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때로 시대에 뒤떨어진 구닥다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회적으로 '좋다'고 여겨지는 룰을 따르지 않으니 때로는 사회부적응자로 보이기도 하고, 무능하다고 비판받기도 한다. 사실 이 모든 비판을 견디면서도 이 카테고리에 남아있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이 카테고리에 속하는 사람들은 자신과 같이 조금 이단아적인 기질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커뮤니티를 찾곤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만 이런건 아니라는 위안을 받는다. 


이 마지막 카테고리에 속한 사람들 중 드물에 성공한 사람들이 나오기도 하는데 그건 그들이 변했다기 보다는 끊임없이 변하는 사회적 트랜드가 어쩌다 찰칵, 이들이 속해있고 추구하는 가치와 합이 맞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 같다. 문제는 이렇게 한 번 사회적 성공을 맛본 사람들은 계속해서 시대적 트랜드에 자신을 끼워맞추며 자기가 경험했던 성공을 이어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세번째 카테고리에 속했던 사람들이 시대적 변화에 맞춰 첫 번째 카테고리에 잠시 속하는 성공을 맛본 후 다시 세 번째 카테고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두 번째 카테고리로 이동하는 것을 아주 쉽게 볼 수 있다. 반짝거리던 사람들이 평범한 닝겐이 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꽤나 슬픈일이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한 경고음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살거라구! 

그래서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하면 세번째 카테고리에 속한 인간으로 살고싶다. 그러다 시대적 트랜드가 잘 맞으면 잠깐 첫 번째 카테고리에 속하는 행운을 누릴 수도 있겠고 아닐 수도 있겠지만, 곧 다시 세번째 카테고리로 낙하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 사실 말은 쉬워도 엄청 어려운 일이다.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나 삶의 방식이 사회가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방식이 아님에도 그것을 끊임없이 추구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뭘 원하는지 아주 명료하게 알아야 할 뿐 아니라 남이 뭐라든 신경쓰지 않을 수 있는 자존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방법은 있다. 끊임없는 훈련, 이렇게 살기 위해서 몇 가지 하면 좋은 것들이 있다. 


첫번째로, 나와 비슷한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내 곁에 더 많이 두어야 한다. 부처도 깨닫기 위해서는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한다고 했다. 내 주변이 모두 2번 카테고리에 속하는 사람들 뿐이라면 나 역시 부지불식간에 2번으로 휩쓸려 갈 수 있다. 1번 혹은 3번 카테고리에 속하는 사람들은 드물지만 아주 귀하다. 사실 1번 카테고리에 속하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귀하다고 볼 수 있는데 문제는 2번 카테고리에 있는 사람들중 꽤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1번에 속한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왜냐면 이들은 진짜 자기자신이 원하는 것을 한 번도 제대로 들여다 본적이 없는, 그야말로 에고에 의해서 드라이빙 걸린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뭐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사실 이런 사람들을 오래 지켜보면 그냥 보인다. 1번인지, 2번인지. 문제는 자기만 모른다는 것. 


두번째로 공부. 역사를 보면 3번의 삶을 살다 죽은 수 많은 위인들의 사례를 볼 수 있다. 고흐, 니체, 심지어는 예수까지 그 시대에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은 위인은 많지 않다. 물론 나는 그런 위인은 못 되는 형편이지만, 그래도 그런 위인들조차도 그런 푸대접을 받으면서 삶을 살다갔다는 사실은 꽤나 큰 안도감(?)을 준다. 아주 어린나이에 대학교수로 임용되었음에도 교수생활 10년 하고 때려친 후 쥐꼬리만한 연금을 받으며 글쓰고 산책하고 책읽으며 살아가 정신병원에서 삶을 다한 니체의 삶은 분명 당시 기준으로 성공한 삶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영혼은 그리고 니체 그 자신은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그가 지금 사는 삶이야 말로 그가 살 수 있는 최선의, 최대의 삶이었다는 것을. 역사에는 이런 위인들이 수 없이 많다. 


세번째로 외부가 아닌 내면에 집중. 자본주의 사회는 기본적으로 외부를 보게끔 인간을 끊임없이 부추긴다. 신상품, 새로운 트랜드, 더 빠르게, 더 크게, 더 좋게, 뭐 이런 변화가 좋은 사람들은 그대로 따르면 되고, 나 같이 이런 트랜드에 신물나는 사람은 그냥 그런 것들에서 거리를 두고 그 시간에 나의 내면을 좀 더 탐구하는데 사용하면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나의 에고를 알아차리는 것. 에고는 만국공통 따라쟁이에 시샘꾼이라서 진짜 나의 영혼이 하는 말을 듣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방해꾼이다. 내면을 본다는 것은 이러한 에고의 장난을 알아차린다는 뜻이기도 하고, 에고 너머에 있는 진짜 내 영혼이 원하는 것에 끊임없이 주파수를 맞춘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국 나답게 내맘대로 산다는 건 내 얘기를 잘 들어준다는 거다. 남이 나한테 끊임없이 주입하려는 소리 말고 내가 나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뭔지! 



긴 글을 썻지만, 그냥 한 마디로 줄이자면 나는 앞으로 더 내 맘대로 살 거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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