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남동, 젤라또 가게에서
불편은 이해의 영역에 속한다. 내가 느끼는 불편에 대해서는 '왜 이 상황, 대화가 불편한지' 이해해야하고, 내가 느끼지 못하고 타인만이 느끼는 불편은 상대의 입장에서 헤아려야 한다. 불편함은 발명품 개발, 사회 운동 등 사회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게하는 기능이 있지만, 어떤 순간에는 더 큰 갈등을 야기할 뿐이다. 따라서 마침내 다양성이 인정받는 현 사회에서 타인의 불편함을 감지하고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최근 고등학교 친구들과 젤라또 가게에 갔다. 아무도 없는 가게에 들어서니 피리부는 소녀마냥 작은 가게는 순식간에 사람들로 가득찼다. 아니면 오후 5시가 당 떨어지는 시간인가? 어쨋거나 직원이 한 명인 가게에서 우린 차례대로 젤라또 받을 순서를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친구들에게 너무너무 하고 싶은 말이 생긴 것이다.
(고향 친구들을 만나 고조된 부산 억양으로) "너네 <남의 연애> 보나?"
친구들은 하나같이 보지 않는다고 했다. 오히려 한 친구는 "그게 뭔데?"라고 되물었다. 나는 친구가 이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제발 보고 감상평을 나눴으면 하는 마음에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들이 나와서 연애하는 프로그램! 하트시그널 남자판! 내 연애 보다 설렌다!
이 정도의 키워드를 얘기했는데도 친구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때 또 다른 친구가 말했다.
"동성연애 프로그램?"
그제서야 물어본 친구는 이해했다는 듯 웃었고 나는 이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공감해주는 이가 없어 아쉬운 채로 젤라또를 먹었다. 맛있었다. 그런데. 한 입을 삼키고.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가게에 우리만 남을 때까지 기다렸다.
"나 방금 실수했어"
그러자 <남의 연애>를 한 방에 이해시킨 친구가 나를 보며 "뭔지 알겠다" 라고 했다.
5분 전, 내가 친구를 보며 <남의 연애>를 신나게 설명할 때 뒤에 여자 두 분이 계셨다. 우리의 대화에 상관없이 끊이질 않는 대화를 나누던 두 분은 내가 프로그램을 꺼낸 순간부터 나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실수했다'
맞다. 아닐 수 있다. 연인 사이가 아닌 친구 사이일 수 있다. 하지만 만약에 맞았다면? 그래서 내 말을 듣고 숙연해진거라면? 그런거라면 그들이 입장에서 나는 동성연애를 그저 재미로 소비하고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삶이자 누군가는 지금도 편견과 맞서싸우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과도한 상상도, 내가 두 분의 입장이 되어 보지 않았기에 함부로 얘기하기 어렵다.
하지만 내가 <남의 연애>를 시청하는 이유는, 그들의 삶을 이해해보기 위함이다. 그리고 남녀의 연애와 다를 바가 없다는 걸 알고난 이후론 나의 연애처럼 몰입해서 보고 있다. 내가 <나는 솔로>, <하트시그널>, <솔로지옥>을 보는 것과 똑같다.
누군가의 불편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더 많은 공부와 노력이 필요하다. 누군가가 나의 불편함을 이해해줬으면 좋겠듯이. 다양한 사회문제들이 놓일 때마다 현상을 이해하고 그 중 약자는 누구인지, 왜 이런 문제가 생겼는지 알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그리고 그 전까지는 필요하다.
르몽드의 입단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