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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yla Y Oct 31. 2020

어때, 셰프 된 느낌이지?

그렇게 감자죽과 애호박 절임이 탄생하였다.

  J는 마트 구경을 좋아한다. 그것은 연애시절부터 그랬다. 나는 쇼핑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데이트 때 가끔 J를 따라 마트에 구경 가는 것은 나름 재미가 있었다. 우리의 데이트 장소는 보통 용산이었는데, 식사를 하고 카페를 갔다가 헤어지기는 괜히 아쉬울 때 지하에 있는 대형 마트 식품 코너를 한 바퀴 구경하고는 했다. 누군가는 조금 웃기게 생각할 수 있지만, 생각보다 흥미로운 데이트 코스였다. 1인 가구나 나무늘보로 변태 하기 직전의 현대인들을 위해 즐비하게 진열된 즉석식품들은 어찌나 다양하고 획기적인지, 우리는 그것을 보며 문명의 위대함을 느끼고는 했다.


  그러나 그런 감상과는 달리, 결혼한 지금 그 문명의 혜택을 잘 누리고 있냐고 묻는다면 머쓱하게 웃어 보이기나 해야지 싶다. 밀 키트의 놀라운 구성에도 불구하고 우리 집 냉장고는 자연 그대로의 식재료가 구성하는 비율이 가히 일방적이다. 이러한 현상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한 가지 재료로 직접 만드는 요리의 양과 다양성이 밀 키트로 만들 수 있는 그것과 가격 대비 차이가 많이 난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 두 번째는 집 근처에 재래시장이 있어서 식재료를 비교적 저렴하게 많이 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세 번째는 J의 요리와 건강한 식사에 대한 열정 때문이다.


  물론 나도 '집밥'이 가장 몸에 좋을 것이라는 사실에는 어느 정도 동의한다. 하지만 재료를 하나하나 씻고 다듬고 요리를 하는 과정의 문턱이 너무 높은 나머지, 차마 실천은 못했던 부분이다. 그러나 J는 달랐다. J는 심지어 나 같은 하수와 함께 밑반찬까지 직접 다 만들려는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그렇게까지는 죽어도 못한다는 나의 몸부림과 친정과 시댁 그리고 반찬가게의 원조 덕분에 그 계획은 다행스럽게도 무산되었다.


"이렇게 우리 둘 다 많이 쉴 때 아니면 언제 해보겠어..."

"그건 그렇지. 아니, 그런데 생각해봐. 그만큼 집에서 많은 시간 있으면서 삼시 세끼 먹는 건데 그럼 우리 에브리데이 새 반찬 만들어야 돼."

"그래, 그것도 그렇지...."


  많은 눈치 게임 끝에 우리는 결국 합의를 했는데, 자주 바뀌는 밑반찬은 사서 먹기로 하고 가끔 먹고 싶은 반찬이나 메인 요리는 되도록 직접 만들기로 한 것이다. 요리에 거대한 장벽을 느끼고 있던 나로서는 그것도 상당한 부담이었지만 어쨌든 그것은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메리 메리지 레시피 1 - 어때, 셰프 된 느낌이지?


  J는 홀로 오랜 유학 생활을 했다. 그것도 식생활과 문화가 완전히 다르고, 대한민국처럼 손만 뻗으면 재빠르게 모든 것이 준비되어있는 편의 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지구 반대편에서. 그러니 J의 생활력 등은 나의 나이브함과 비교할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J로서는 나의 막막함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자신의 방식을 강요하기보다는 상당 부분 배려해주고, 필요한 부분은 친절하게 설득을 하기도 했고, 많은 부분 도와주었다. 특히 나에게 요리의 즐거움을 알게 하겠다는 J의 열정은 어찌나 대단한지, 하루는 직접 재료 손질을 다 해놓고 뿌듯한 표정을 짓고는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었다.


"어때, 셰프 된 느낌이지? 원래 이런 재료 준비는 다 아래 직원들이 하고 셰프가 간 맞추고 요리하는 거랬어."


  나는 가지런히 놓인 채 썬 감자와 반달 모양 애호박을 내려다보며 "으응..." 하고는 아주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남자 완전 진심이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그리고는 아까 J와 함께 찾아보았던 레시피를 찬찬히 읽으며 서툴고 동선의 효율성 따위는 하나도 없는 채로 요리를 시작했다. 그날의 목표는 감자채 볶음과 애호박 볶음이었다.


"너무 오래 볶거나 뒤적거리면 물러지니까 조심해서."

"근데 안 뒤적거리면 또 눌어붙는 거 같은데."

"그러니까 감을 보고 적당한 때에 뒤적여 줘야 해."

"그게 뭐야. 감이 뭐야. 이거 언제까지 익혀야 돼?"

"보고 적당히 익었다 싶으면 그때 양념 넣고 짧게 볶아 줘."

"적당한 게 뭐야. 그렇게 애매한 표현 말고 정확하게 몇 분 몇 초 정도인지 알려주면 안 돼?"


  라면 끓일 때도 계랑 컵에 맞춰 물을 부어야 안심하는 나 같은 인간에게 '적당히', '노릇노릇', '폭신폭신' 같은 설명은 너무나 어렵기 그지없었고, 먹어봤던 맛, 익숙한 비주얼인가 싶었을 때는 이미 그 '적당하다'는 타이밍을 놓친 후였다. 결국 완성품을 그릇에 옮겨 담았을 때는 감자채 볶음과 애호박 볶음이 아닌, 감자죽과 애호박 절임이 된 채였다.



"진짜 생각보다 괜찮다니까?"

"아냐, 보기만 해도 구려."

"그래도 처음 한 것 치고 아주 괜찮아. 다음에는 불 세기랑, 소금 양이랑, 조금 더 조절하면 더 예쁘고 맛있을 거야."


  J는 처음 한 것 치고 아주 훌륭하다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으나, 나는 이미 비주얼만으로도 망했음을 직감하였다. 그렇지만 그렇게 두 반찬을 추가로 올린 저녁상을 J는 맛있게 먹어주었고, 나는 입에 넣자마자 문드러지는 식감을 느끼며 J의 상냥함에 대한 고마움과 이 두 반찬에 대한 오기를 동시에 느꼈다. 다음에는 반드시 용량과 시간이 수치화된 레시피를 찾고 말리라.


  그 뒤로 얼마 동안은 반찬만 만들었다 하면 감자채 볶음과 애호박 볶음이었고, 그 두 반찬의 끝없는 향연에 J는 한동안 장바구니에 감자와 애호박을 넣지 않았다.






  최근에는 J로부터 애호박 볶음 전문가라는 몹시 과분한 타이틀을 하사 받았다. 이제는 레시피나 정확한 수치 계산 같은 것 없이도 얼추 익숙한 맛을 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야 '적당히', '노릇노릇', '폭신폭신'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이것이 '일반적인' 실력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모두들 얼마나 많은 임상 데이터를 모아 온 것인지 경의로울 뿐이다. 어쩌면 재능의 차이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나의 첫 반찬 도전기는 처참했으나 또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다음에는 이거보다 잘해봐야지, 라는 마음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기꺼이 어려운 부분을 먼저 준비해주고──덕분에 셰프 느낌도 느껴 보고──감자죽과 애호박 절임도 맛있게 먹어주고 칭찬해주는 J의 역할이 컸던 것 같다. 나도 조금 더 J에게 상냥한 아내가 되어주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오늘 저녁도 애호박을 볶으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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