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ayla Y Mar 16. 2021

블러디 크리스마스이브

요린이의 장비 욕심이 부른 참사

  나는 요리의 '요'자도 모르는 주제에 조미료에 대한 욕심은 또 지대해서 우리 집 선반과 냉장고에는 온갖 조미료들이 즐비해 있다. 간장, 된장, 고추장을 포함한 기본적인 양념부터 시작해서 시댁과 친정에서 얻어온 멸치 액젓, 매실액, 그리고 표고 가루, 고운 고춧가루와 들기름 등등 까지. 최근에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구운 채소 샐러드에 꽂혀서, 정신 차려보니 이미 향신료 군단이 조미료 선반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그 와중에 J는 화학조미료는 또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며, 그렇게 나의 소고기맛 가루는 영원토록 봉인되었다.


"나는 슬퍼."

"왜 갑자기."

"오빠가 계란말이 틀 안 사줘서."


  뒷동산 오르려고 에베레스트 등정등산복을 맞춰 입는 어르신들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 요리하기는 세상 제일 번거로워하면서도 재미있어 보이는 조리 도구만 보이면 사고 싶은 마음은 왜일까.


  채칼, 계란말이 틀, 와플팬, 사각 프라이팬, 계란 프라이 틀, 계란 거품기 등등을──이렇게 쓰고 보니까 계란에 원수진 사람 같다──부엌에 모시기 위해 열심히 J를 설득했지만, 저 중에 그의 공감을 얻은 것이라곤 채칼과 사각 프라이팬 뿐이었다. "저거 사도 일 년에 두 번만 쓸 거잖아."라는 정직한 코멘트와 함께.


  심지어 채칼은 호기심에 파프리카를 썰어보다가 손가락 끝을 함께 날려버린 후로 소고기맛 가루와 함께 봉인되었다.





메리 메리지 레시피 2 - 블러디 크리스마스이브


"잡채 먹고 싶다."


  J의 한마디와 함께 12월 24일 아침, 블러디 이브의 서막이 그렇게 올랐다.

  때는 크리스마스이브였다. J와 나는 조촐한 크리스마스 전야 파티를 계획 중이었다. 그 날의 메뉴는 바질 페스토 파스타와 감바스 알 아히요, 그리고 홍합 스튜였다. 감바스 밀 키트는 시간을 맞춰 잘 도착하였고, 파스타 소스와 홍합 스튜에 넣을 와인, 그리고 기타 등등의 식재료들도 잘 준비되었다.


  잡채는 분명 초대된 손님이 아니었다. 지금껏 잡채는 너무 어려우니까 명절까지 기다리면 곧 먹을 수 있다고 설득해왔으나, 독주회를 끝낸 J가 근래 아주 열심히 요리한 것에 비해 실적이 좋지 않았던 나는 왠지 모를 조바심이 들었다. 그러니 앞뒤 재지 않고 덥석 그 말을 물었던 것이다.


"점심에 잡채 해줄까?"

"웅!"

"구래!"


  예전에 한 차례 성공적인 잡채 데뷔를 한 적이 있던 나는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얼마나 많은 공정과 정성이 들어가야 하는지를 상기하며 아주 약간 후회했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잡채 노래를 불렀던 J가 상당히 행복해 보여서 차마 약속을 무를 수가 없었다.


  나는 양파를 썰었고, J는 내 옆에 서서 얼마 전에 내가 졸라서 산 채칼로 당근을 열심히 채 썰어 주었다. 어느 정도 재료 준비를 마친 J는 잠시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갔고, 그 틈에 나는 나머지 재료를 마저 정리해 놓고는 내가 이렇게 열심히 했다며 칭찬을 강요할 준비를 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파프리카만 썰면 되었다. 그런데 그 채칼이 자꾸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나도 써보고 싶다. 채칼.


  그리고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서 순전히 호기심에 파프리카를 썰어보다가 네 번째 트라이만에 결국 그 사달을 내고 말았다.


"아아아악!!"

"무슨 일이야!"

"채칼 쓰다가 손 베었어어어..."


  내 비명소리와 함께 J는 화장실에서 뛰쳐나왔고, 나는 피가 철철 흐르는 약지를 붙들고 지혈할 거리를 찾아서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싸매고 있었다. 거짓말 아니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 통증이 기억날 정도로 아팠다. 나보다도 더 놀란 것 같은 J는 당장에 나를 데리고 근처 병원으로 갔고, 나는 요리 아무나 하는 거 아니라며 앞으로 남편이 해주는 거나 먹으라는 간호사 선생님의 조언(?)을 들으며 드레싱을 받고 돌아왔다.

  이렇게 간단하게 말하지만, 정말 오랜만에 피를 봐서 놀란 건지 아파서 놀란 건지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시고 현기증이 돌았다. J의 손에 거의 매달려 가면서도 병원까지 가다가 몇 번이나 주저앉기를 반복했는데, J는 그 창백한 얼굴을 보고 더 놀랐던 것 같다.


  결국 잡채도, 감바스 알 아히요도, 홍합 스튜와 바질 페스토 파스타도 J의 몫이 되어 버렸고, 인덕션과 거의 한 몸이 된 그 뒷모습을 보면서 어찌나 미안했는지 모른다. 나는 미안하고도 민망한 마음을 담아 최대한 열심히 그릇을 세팅하며 J의 곁을 알짱거렸다.

  나의 피와 J의 땀, 우리의 눈물이 함께한 크리스마스이브 파티는 다사다난했으나, 그래도 나름 풍요롭고 행복하게 마무리되었다.







  그 사건으로 내 오른손은 2주 정도 봉인당했고, 동시에 채칼도 영원히 봉인되었다.

  그 뒤로도 여전히 나는 새 조리도구를 볼 때마다 욕심을 내지만 그때마다 채칼 사건을 떠올리며 있는 것들이나 잘 쓰자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고 있다.




Postscript

  엄마에게 얼마 전 김장할 때 남동생도 채칼 잘만 쓰지 않았냐고 여쭸는데, 하시는 말씀이 원래 걔는 손이 야무졌고 너는 항상 좀 손이 엉성하다고 걱정 어린 눈을 하며 혀를 쯧쯧 차셨다. 그리고 세상에 어느 누가 파프리카를 채칼로 써냐며 부끄러우니까 어디 가서 파프리카 썰다가 다쳤다고 말하지 말라고도 덧붙이셨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글로 쓰고 있는 걸.

매거진의 이전글 어때, 셰프 된 느낌이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