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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몬숲 Apr 20. 2024

쓸데없이 서럽게 기만한 맘

콕. 콕. 콕. 콕. 


김소월, <진달래꽃>


잊었던 밤 

바람 불어 봄꽃이 필 때에 

어찌타 그 새끼는 죽지도 않고 또 왔는가 

저도 잊고 나니 저 모르던 그때

어찌하여 괴로웠던 꿈조차 함께 오는가 

쓸데도 없이 서럽게 기만한 맘 


며칠 전 꿈속에 파라오가 나왔다. 

아 꿈에서 깨었으면… 

나의 뇌를 씻어버렸으면 …


잿빛꼴 무표정의 여자가 파라오의 애인이라고 했다. 

잿빛이라니, 너에게 잘 어울리는 여자구나. 

이 여자도 참 불쌍한 여자구나. 


여자가 말했다. 

"우리 오빠, 그런 사람 아니에요." 


그 여자가 나를 경멸의 눈빛으로 쳐다보지 않았다면 

나는 욕을 먹더라도 그 여자에게 말했을 거다. 

"제발, 제발 도망치세요."


그 여자가 가자미 눈을 하고 나를 내리 깔보며 하찮게 대하지 않았다면 

나는 말했을 거다. 

"당신에게도 서럽게 기만한 깊은 밤이 곧 올 거예요. "


파라오는 덤프트럭을 몰고 나를 쳐 죽이려 했다. 

아 나 저 표정 아는 표정이지 

나에게 "너를 칼로 찔러야 할 것 같다"라고 말할 때의 소름이 평범이던 표정 

 

파라오는 덤프트럭을 운전했다.

거대하고 무식하고 위협적이다. 

파라오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나를 찾았다. 


꿈속의 다음 장면은 내가 타자화 되어 반으로 갈렸다.  

왼쪽은 파라오의 덤프트럭이 나를 기다리고 있고 

오른쪽은 내가 항상 가는 골목길이다. 


나는 꿈 속에서 파라오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고 

앞을 향해 걸어가는 나의 모습을 주시하고 있다. 

곧 내가 죽어있는 모습을 보게 될 거라는 촉이 왔다.


'그쪽으로 가면 안 돼. 파라오가 있어. 

가면 안돼.. 제발.. 제발..' 


애타는 자아의 소리를 들은 것인지 

꿈속의 나는 파라오있는 골목 바로 골목에서 길을 틀어 돌아왔다. 

내가 한 골목만 더 앞으로 갔다면 파라오는 나를 발견했을 것이다. 

파라오가 왼쪽으로 핸들을 꺾었다면 나는 덤프트럭에 치여 죽었을 것이다. 


나는 뒤돌아 나오는 나를 보고 꿈속에서 환호했다. 

'하나님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


그리고 어제 또 꿈을 꿨다. 파라오는 아니었으나 파라오였다. 

사람들은 파라오가 등장하자 나를 쳐다보며 수근수근했다. 

'전남편이라며?'

'신혼첫날부터 학대 했다던데?'

'저 여자 사기 당한거래'

'저 여자 죽을 뻔했다던데'

'어쩜, 멀쩡하고 똑똑한 여자인 줄 알았는데'

'아니, 저렇게 좋은 애한테 왜 그런 일이 생긴 거래?'

'ㅉㅉㅉ'


처음 보는 어떤 사람들이 말없이 내 주변을 감싼다. 

그리고 나를 그 속에 보호한다. 

아무 말 없지만 따뜻하다. 눈물이 났다. 배가 고프다.


곧 회색문이 열리고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린다. 

사람들이 죽어있다. 


'나 너무 무서운데 너무 화가 나네. 네가 뭔데. 네가 뭔데!!!!!!

이 미친놈아!! '


나를 보호했던 사람들이 사라지고 싸늘한 공기와 

파라오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파라오는 여기, 어디에나 있다. 

칼을 들고 쫓아오는 파라오의 소름 끼치는 한기가 느껴진다. 


심장이 미친 듯이 철렁 거린다. 

철석철석 귀에서 맥박이 뛰는 소리가 들린다. 

손발이 저리고 굳어간다.


'아 꿈에서 깨야 되는데. 꿈 깨라고!! 제발 꿈에서 깨어나!!!'


나는 내 작은 몸이 겨우 들어가는 작은 창고가 떠올랐다. 

그 창고의 문을 열면 분명히 삐그덕 소리가 날 거고 

창고 안에 들어가면 나에게는 문이라는 보호장치가 생기지만 

내가 여기에 있다는 소리가 파라오 귀에 들어간다.


나는 재빨리 문을 열고 창고에 들어갔다.

문을 여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나 살았다!' 

'혼자만 살았구나' 

'다 죽었는데. '

'나를 구한다고 죽었는데... 나만 살았구나...'


창고 안에는 다행히 문을 잠글 수 있는 고리가 하나 달려있다. 

'나만 살았구나... 나만 살았구나...'


고리 문을 잠그자 끝으로 문을 찍는 소리가 들린다. 


콕.

콕.

콕.

콕!


그리고 나의 근원적 외로움에 쓸데없이 서럽게만 오고 가는 맘

슬픔에는 익숙이 없다. 



그러나 너의 조각들을 위로했니? 

너는 정말 용감한 사람이구나 

너를 만나게 되어 기뻐

네가 안전하다고 느끼면 좋겠어.

내 조각들도 그것을 이제 알거야. 

나는 언제나 여기서 내 조각들을 지켜낼거야. 


이봐, 기운내! 

너는 지금 글을 쓰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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