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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굿모닝선샤인 Dec 28. 2021

당신의 모든 감정은 옳다

<당신이 옳다>를 읽고



가장 절박하고 힘이 부치는 순간에 사람에게 필요한 건 ‘네가 그랬다면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너는 옳다’는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한 수용이다.
<당신이 옳다> 중에서




세상에 누군가 단 한 명이라도 자신의 감정에 공감해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 드라마를 보면 어려움과 위기 속에서 살아가는 여자 주인공에게 이런 친구가 한 명씩은 꼭 있다. 남자에게 차여도, 상사에게 구박받아도 그날 저녁 집 근처 술집이나 카페에서 하루 있었던 일을 나눌 수 있는 친구. 서로의 마음에 공감해주고 이해해주며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존재가 있다. 그런 주인공을 보면서 늘 부러웠다. 나에게도 그런 친구 한 명 있다면 육아하는 어려움을 이겨내고 극복해나갈 수 있을 텐데... 하며 부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결혼 전에는 나도 그런 친구가 있었다. 대학 시절에도, 직장에 다닐 때도, 가볍게 불러내 속상했던 일을 토로하면 괜찮다고 받아주고 나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웃으며 말해주는 친구가 많았다. 커피 한잔, 맥주 한잔 앞에 놓고 수다를 한바탕 떨고 나면 마음의 응어리가 순식간에 녹아 없어졌다. 왜 화가 났었는지, 왜 속상했는지 눈 녹은 듯 사라져 마음이 가뿐해졌다.

 

결혼을 하고 타지로 이사 오면서 직장 친구들도, 학창 시절 친구들도 멀어졌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외딴 도시에서 살게 되었다. 새로 알게 된 얼굴들은 모두 아이 어린이집 친구 엄마, 문화센터에서 만난 아이 친구 엄마였다. 인사를 나누고 가끔 어울려 놀기도 했지만 속내를 드러내고 감정을 나누기엔 먼 사이였다. 고향에 가야 일 년에 한두 번 만나는 친했던 친구들은 코로나로 더 만날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한번 만나면 그간 있었던 일을 늘어놓고 따라잡기에도 바빴다. 일상의 감정을 나눌 여지는 멀리 사라졌다.

 

풀어내지 못한 감정들과 쌓여가는 부정적인 마음들을 털어놓을 곳이 없었다.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기록할 생각으로 인스타그램을 시작해서 남기고 싶은 사진을 올리고 짧은 일상을 적었다.

 


저녁 식사를 앞두고 고개를 도리 도리 하는 아들 사진을 올린 피드에 댓글과 ‘좋아요’가 달렸다.

 

‘저도 그래요. 우리 아이도 안 먹어서 속상해요’

 

공감의 목소리와 힘내라는 위로가 따라왔다. 그렇게 온라인 세상에서 ‘당신의 감정은 옳다’는 어루만짐으로 소통을 시작했다. 아이만 바라보고 사는 소소한 일상에 누군가 내 감정에 동감해주고 나만 힘든 게 아니라는 말을 전할 때 힘이 생겨났다. 블로그에 육아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다. 엄마도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글에 ‘저도 행복을 찾아 누려야겠어요’라는 댓글이 달렸다. 나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일상을 버틸 용기를 선물해줬다. 누군가 내 감정을 읽어주고 너의 마음은 옳다고 대답해주었다. ‘그럴 수 있다, 나도 그랬다’는 울림이 내 지친 가슴에 산소를 공급해주는 것처럼 숨쉬기가 편해졌다. 어느새 나는 글을 쓰며 내 감정을 종이 위에서 헤아림 받고 있었다.






엄마가 내게 무엇을 요구하고 기대하는 마음 없이 여유 있게 내 존재 자체에만 관심을 갖고 주목하고 있다는 느낌은 아이의 입장에서 더할 수 없이 안전하고 편안하다. 엄마의 그런 태도는 아들이 자기 말을 계속할 수 있게 하는 힘을 준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공감이 그것이다. 아이에게도 배우자에게도 사회적 관계의 누군가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원리다.
<당신이 옳다> 중에서


둘째가 두 돌이 가까워지면서 두 아이가 싸우는 일이 잦아졌다. 그날도 장난감 하나로 싸움이 붙었다.

 

“와앙~~~”

 

첫째의 울음소리에 달려가 보니 둘이 씩씩거리며 때리고 싸우고 있다. 둘째는 장난감을 뺏어 달아나고 첫째는 그게 분해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동안의 서러움이 겹쳤는지 울음이 멈추질 않는다.



 

“지유, 많이 속상했어? 속상해서 우는 거야?

동생이 장난감 뺏어가서 슬프고 속상하구나.

자꾸 동생이 훼방 놓고 말썽 부려서 많이 힘들지? “

 

울음을 그치지 않던 아이가 나를 빤히 바라본다.

 

“엄마도 어릴 때 그랬어. 동생이 매번 장난감 뺏어가고 망가뜨려서 진짜 속상했어. 그럴 수 있어.

너만 그런 게 아니야. 엄마도 그랬어.”


엄마도 그랬어?”


“그럼, 용우도 동생이 그래서 많이 속상하대. 지유만 그런 게 아니야”


용우도? 동생이 힘들게 한대?”


“응. 그렇대. 그런데 동생을 사랑하니까 속상해도 이해해주는 거래. 지유도 눈물 닦고 동생 한 번만 용서해줄 수 있어?”


싫어... 동생 미워. 밉다고! 없어지면 좋겠어.”


“그렇구나. 지유가 동생이 많이 밉구나. 그럴 수 있어. 많이 속상하구나. 그럼 속상한 마음 좀 가라앉으면 다시 얘기할까?”

 

아이를 키우며 가장 힘들었던 것은 감정 조절하기였다. 두 아이 가정 돌봄에 지쳐 마음의 여유는 없었던 터라 아이들이 울고 짜증 낼 때 마음을 진정시키고 달래기가 힘들었다. 울음이 그치지 않으면 내 안의 힘든 마음들이 화산처럼 쌓여 불꽃처럼 터졌다. 몇 번을 참다 참다 통제되지 않는 아이들에게 화를 내고 소리를 내질렀다.


"나도 힘들다고. 왜 그렇게 말을 안 들어!

제발 그만해!!!”

 

소리치고 나면 피가 머릿속으로 솟구치는 듯 가슴이 쿵쾅쿵쾅거렸다. 겁에 질린 아이들 눈동자에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을 불현듯 깨닫고 자괴감이 차올랐다. 그런 날은 하루 종일 날카로운 돌멩이를 삼킨 듯 마음이 뾰족해지고 미안함에 목이 메었다.

 

소리치는 것으로 아이들 울음을 멈출 수 있지만 마음을 달래줄 수는 없었다. 책에서 읽은 대로 마음을 읽어주고 ‘너의 마음은 옳다’고 말하는 연습을 시작했다. 틀린 감정은 세상에 없다는 것을 염두하고 너의 모든 감정은 옳다고 말했다. ‘너의 속상한 마음은 옳다, 그럴 수 있다’는 말이 10번 소리치는 것보다 효과적이었다. 한번 울면 목이 터져라 우는 첫째가 ‘많이 속상하지’라는 한 마디에 귀를 찢는 듯한 울음을 멈췄다.

 

감정표현에 서툰 아이들은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소리치고 우는 것이다. 엄마가 자기 마음을 알아주고 감정을 읽어주고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알려준다는 것을 깨닫고 울음을 그쳤다. 엄마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마음을 읽어주고 공감해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 것인지 엄마가 되어 더 절실하게 배우고 있다.

 

사람은 하루 종일 변화무쌍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간다. 누군가 곁에서 네 마음은 옳다고 나직이 바라봐주고 관심을 갖는다면 누구나 스스로 자신의 우울한 감정에서 헤쳐 나와 마음을 다스리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의 감정을 따뜻하게 바라봐주고 공감해주기 위해서 우선 내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읽고 쓰고 걸으며 마음을 다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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