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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굿모닝선샤인 Dec 24. 2021

월든 호수가 육아에 전하는 말

육아를 멈추고 호숫가를 거닐다


처음 <월든>을 읽었을 때 혼자 자립적인 삶을 살기 위해 숲 속으로 들어간 그의 용기가 대단하게 여겨졌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 혼자선 살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의 실험적인 정신이 인상 깊었다. 물욕을 버리고 최소한 살림살이만 가지고 소위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한 그의 삶의 방식이 매력적이었다. 도시에 살면서 온갖 도시가 주는 혜택 없이는 하루도 버티기 힘든 나로서는 그런 무모함과 도전 정신이 탐났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월든>을 통해 고독의 의미, 자연이 주는 힘, 독서와 고전의 영향력, 욕심 없이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사는 삶 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책을 읽으며 그가 제시하는 삶의 방식을 홀린 듯 따라갔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고전이 그러하듯 그가 전하는 말의 울림은 강했다.




올해 초 새벽 기상을 시작했다. 소로우가 전하는 아침의 의미에 대해서 읽으며 일찍 아침을 시작하는 것이 그날 하루를 남다르고 의미 있게 출발할 수 있게 해 준다는 믿음이 생겼다.





매일 찾아오는 아침은 자연처럼 소박하고 순결하게 삶을 살아가라고 나를 초대했다.
나는 그리스 사람처럼 새벽의 여신 아우로라를 숭배해왔다. 아침 일찍 눈을 떠서 호숫가로 나가 목욕했는데 이는 일종의 종교의식이었고 내가 한 일 중에서 가장 잘한 일이기도 했다. 중국 탕왕의 욕조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매일 자신을 새롭게 하라. 이를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평생을 반복하라.’



새벽 5시, 나만의 시간에 감사일기를 쓰고 하루를 계획했다. 아이들의 울음소리에 간신히 눈 뜬 날은 피곤함과 짜증이 몰려왔다. 해야 할 일들은 짐 더미처럼 쌓여있고 마음은 제대로 눈을 뜨지도 못했다. 눈곱을 비벼 떼고 끈적이는 걸음을 옮겼다. 나의 의지가 아니라 아이들의 요구로 깨어난 날, 그런 날은 온몸의 찌뿌둥함이 무겁게 어깨를 눌렀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데 배고프다고 칭얼대는 울음도 듣기 싫었다.


새벽의 여신 아우로라는 만나지 못했지만, 소로우처럼 아침 일찍 눈을 뜬 날은 그의 말처럼 나 자신이 새롭게 태어난 듯 몸에 상쾌함이 녹아있었다. 내 의지를 가지고 주체적으로 아침을 맞이 한 새벽 5시, 밤 사이 눌려있던 피곤을 머리 위로 쭉 피며 털어낸다. 책상 위에 준비해놓은 물 한잔을 마신다. 온몸에 생기가 돈다. 아직 어둠이 지배하고 있는 새벽시간을 깨운다. 책상에 앉아 노트를 펼친다. 펜을 들어 오늘 날짜를 꾹꾹 누른다.


‘나는 오늘 하루를 최고의 하루로 만든다.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나에게는 현재의 행복을 선택한다’


나를 흔들어 깨우는 자기 확언 메시지를 적는다. 긍정적인 메시지와 함께 시작하는 하루는 특별해졌다. 새로운 나로 변신한 기분으로 시작한다. 하루 종일 투닥거리는 육아생활을 버틸만한 힘을 얻는다.



모든 기억할 만한 사건은 아침의 대기에서 아침 시간에 벌어지는 법이다. 《베다》4에서도 ‘모든 지성은 아침과 함께 잠에서 깬다’고 말했다. 모든 시인과 영웅 들은 멤논처럼 오로라의 자식이고, 해가 뜰 때 비로소 자신의 음악을 토해낸다. 이처럼 태양과 보조를 맞추어 활발하고 기운에 가득 찬 사고를 하는 사람에게 하루는 언제나 아침이다. 시곗바늘이 몇 시를 가리키든, 다른 사람들이 어떤 태도로 일을 하 건 중요치 않다. 아침은 내가 온전히 깨어 있으며 내면에 새벽이 깃드는 시간이다. 도덕적 개혁은 잠을 떨치려는 노력과 같다. 잠에 빠져 있었던 것이 아니라면 자신의 하루를 형편없이 보내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모든 지성은 아침과 함께 잠에서 깨어난다고 했다. 아침에 온전히 깨어난 정신으로 내면을 들여다본다. 주변 환경에 무기력하게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주도적으로 삶을 일구어 나간다. 자존감을 끌어올린다. 그런 의지와 노력으로 시작된 하루는 더 생산적이고 더 즐겁게 보내고 싶어지는 무의식을 작동시킨다.





자연을 바라보며 고요한 시간을 갖는다






여름날 아침이면 언제나 그렇듯 몸을 씻고 햇살이 비추는 문가에 앉아서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조용히 몽상에 잠기기도 했다. 소나무와 히커리, 옻나무로 둘러싸인 상태에서 나지막이 들리는 새소리를 들으면서 그 누구의 방해도 없이 고요함과 적막함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둘째 임신 8개월, 호수 공원이 보이는 동네로 이사를 했다. 이사를 할 때 가장 중요하게 눈여겨보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근처에 공원이나 산책로 등 걸을 만한 넓은 곳이 있느냐였다. 어린아이를 키우면서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이 산책과 놀이터에서 놀기였다. 유모차를 밀며 한 시간 남짓 걷고 나면 긴 육아시간을 버틸만했다. 첫째를 두 돌 때까지 키울 때에도 근처에 큰 센트럴 파크가 있는 동네에 살았다. 아침이 되면 무조건 유모차를 밀고 그곳으로 향했다. 아이와 함께 산책을 하다가 벤치에 앉아서 나무와 비둘기를 바라보았다. 놀이터에서 한참 놀다 돌아오면 시간은 즐겁게 흘렀다. 계절마다 바뀌는 자연의 변화를 보며 그로부터 계절을 즐기고 버티는 힘을 배울 수 있었다.


이사한 동네에는 큰 호수공원이 있었다. 6개월 둘째를 유모차에 눕히고 재우며 아침 호수를 걷는다. 햇살이 내리쬐는 봄날이다. 밤새 울고 뒤척여 잠 못 이룬 지난밤을 잠재운다. 잡념은 가라앉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새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어미 오리가 새끼오리에게 줄 물고기를 낚아 올려 입에 넣어준다.


 '너도 육아하느라 고생이 많겠다.'


내 삶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이른다. 잘 먹고 잘 자면 그거면 충분하다. 욕심은 버릴 일이다. 욕심을 버리면 삶이 단순해진다. 자유롭게 허공을 날아가는 새들을 바라보며 더 잘하겠다는 욕심은 버리겠다고, 더 좋은 엄마가 되려고 너무 애쓰며 나를 혹사시키지 말자고 다독인다. 잠든 아이를 바라보며 호숫가 벤치에 앉아 적막한 수면 위로 부드럽게 내리 앉는 새들을 바라본다. 귓가에 봄바람이 스친다. 햇살과 바람과 나무 위에서 지저귀는 새들, 발치에 핀 작은 꽃 들이 마음 한구석에 들어온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육아의 고됨은 물에 씻기고 빈 가슴에 햇살과 봄바람의 따스함이 차오른다.





인생에서 겨울이 주는 의미





시냇물은 환희의 노래를 부르고 기쁘게 봄을 맞는다. 개구리 떼는 강 근처 풀밭 위를 낮게 비행하며 겨울잠에서 막 깨어난 미끈미끈한 생명체를 찾아 헤맨다. 골짜기에서는 눈이 녹아내리는 소리가 들리고, 호수에서는 단단한 얼음들이 빠르게 녹아내리고 있다. 대지는 다 시 돌아온 태양을 맞이하기 위해서 내부의 열기를 발산하는 것처럼, 언덕 비탈에서는 풀들이 봄날의 불처럼 이글이글 타오르고, 이른 봄 비의 재촉을 받은 풀들이 파릇파릇하게 돋는다. 하지만 그 불꽃은 노란색이 아니라 초록색을 뿜어낸다.



눈보라가 치는 겨울이었다. 영하 10도가 연이은 날들, 육아의 혹한기가 찾아왔다. 좋아하던 산책을 나갈 수 없다. 미세먼지, 추위, 아이들의 연 이은 감기로 시간은 길고 지루하게 흐른다. 할 일은 없고 집 안에서 뛰는 아이들은 말릴 수가 없다. 11월부터 시작된 겨울은 3월까지 길기도 했다. 대략 그 4개월은 매해 가장 힘든 시기였다. 나갈 수 없을 땐 집안에서 주름처럼 밀려있는 시간을 어떻게든 빨리 보내고 싶어 시계만 바라봤다. 가끔 놀이터라도 나갔다 오면 감기가 찾아와 2주는 콜록거리며 잠도 못 자는 고행이 시작되었다.


2월 초, 아직도 봄은 멀고 멀었다는 생각에 희망을 찾기 힘들었다. 우연히 나간 호수 산책 길에 땅 속으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두껍게 호수 위에 얼었던 얼음이 녹는 소리일까. 발 밑에 작은 푸른 이파리를 발견한다. 봄이 오는 소리를 찾는다. 겨울의 혹독함과 막연함을 견디는 나무와 꽃눈을 발견한다.


'너희가 용기와 희망이구나. '


겨울은 죽음이 아니다. 다시 태어나는 생명을 위해 참고 준비하는 시간이다. 그 시간이 있어야 꽃이 핀다. 지금 내 육아. 내 인생에서 겨울처럼 길고 지루하고 고된 시간이라 여기며 하루빨리 지나가기만 바 랬다. 그러나 자연은 말해주고 있었다. 겨울은 필요한 시간이다. 이 시간을 통해 나도 견디는 힘을 배운다. 그 안에 새겨 있던 봄의 희망을 배운다.





고독은 필요하다




자연 가운데 살면서 자신의 감각기능을 온전하게 유지하는 사람에게는 암담한 우울이 존재할 여지가 없다. 건강하고 순수한 사람의 귀 에는 어떤 폭풍우도 ‘바람의 신’의 음악으로 들릴 뿐이다. 소박하고 용기 있는 사람을 속된 슬픔으로 몰아넣을 권리를 가진 것은 아무것 도 없다.
내가 사계절을 벗 삼아 그 우정을 즐기는 동안에는 그 어떤 것도 삶을 짐스러운 것으로 만들지 못할 것이다. 오늘 내 콩밭을 적시면서 한 편으로 나를 집에 머물도록 하는 저 보슬비는 지루하고 우울한 느낌을 주지 않고 오히려 내게 좋은 일을 해주고 있다.



자연은 고독 속에서 존재한다. 새벽의 호숫가에 가면 혼자만 그곳에 존재하는 홀로 있음이 좋았다. 결혼 전에는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이 외롭고 우울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아이와 하루 종일 부대껴야 하는 육아 생활에서 홀로 있다는 것은 자유이자 회복이다. 새벽 호수를 바라보며 혼자 세상을 마주하는 기분은 고독 속에 존재하는 자유로움과 진정한 나를 찾는 순수의 시간이었다. 홀로 산책하고 책을 읽으면 잠시나마 육아의 시름과 세상살이의 노이즈를 잊을 수 있었다.


소로우가 비가 오는 날 밖에 나가지 못하고 집안에만 머무르게 된 그 시간을 슬프거나 우울하게 보내는 대신 휴식과 고독을 줘서 감사하다고 한 마음을 이해한다. 비 오는 날 집안에 발 묶여 창문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커피 한잔 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잠깐의 홀로 됨이 세상을 더 온전하게 살아가게 한다. 진정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바라는가 생각하는 시간을 허락해준다.




눈치 보지 않는 삶




사람들이 찬양하고 성공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삶은 단지 한 종류의 삶에 지나지 않는다. 왜 우리는 다른 여러 종류의 삶을 희생하면서 까지 한 가지 삶을 과대평가하는 것일까?



" 00는  5살인데 벌써 영어를 한대!"

" 00는 두 돌 지나자마자 기저귀를 뗐어."


우리 집 첫째는 아직 5살인데도 영어는커녕 자기 이름도 거꾸로 쓴다. 둘째는 두 돌이 지난 지 한참인데 기저귀에 집착한다. 다른 사람들의 자랑 섞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 삶이 휘청거리며 흔들리는 기분이다. 남의 말 한마디로 내 삶의 기준이 틀린 답으로 밀려난다. 나도 저렇게 해야 할까, 우리 아이들도 벌써 그랬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몰려온다. 내 삶이 잘못되고 있다고 말하는 듯 흔들리고 부서진다.


그때 소로우의 글귀를 읽었다. 삶은 단지 한 종류가 아니다. 한 가지 삶만을 과대평가하고 추앙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소로우의 말대로 삶의 방식은 여러 종류인 것이다. 남들이 찬양하고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방식을 왜 내 삶에까지 끌어와 나를 괴롭혀야 하는가. 남의 눈치 보지 말고 내 삶의 방식대로 살면 그만인 것이다. 남의 기준에 맞추지 말지어다. 그 깨달음으로 마음이 편해진다. 기저귀 조금 늦게 떼면 어떠한가, 어른이 되어서까지 기저귀 하진 않을 텐데. 결국 몇 년 후면 한글 쓰고 읽고 다 할 텐데 지금부터 조바심 느끼며 아이들을 다그치고 초조해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모든 꽃엔 각기 다른 때가 있다. 우리 아이들도 다 각기 꽃 피우고 잎 틔울 때가 다른 것이다. 동백꽃에게 여름에 꽃 피우라고 다그치는 것과 같을 이치다. 조금은 한 발자국 물러서서 여유롭게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그게 인생을 사는 방법일 것이다.


남이 그려놓은 삶의 기준이 아니라 나만의 방식으로 인생을 개척하는 가르침을 배운다. 이른 아침을 맞이하고 자연 속에서 가끔씩 홀로 됨을 찾고 겨울이 주는 의미를 상기하며 오늘 하루도 육아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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