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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굿모닝선샤인 Dec 22. 2021

책 여행

책 한권 들고 혼자 여행을 떠났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을 두 가지 고르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주저 없이 책과 여행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책과 여행을 좋아하는데 둘을 합친다면 얼마나 환상적인 조합이 될까? 이름하여 "책 여행". 마음이 답답하고 무거울 때 책 한권 들고 여행지로 떠난다.

 

결혼 전 학교에서 일하던 시절, 주말의 무료함을 어떻게 떨쳐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주말은 순식간에 흘러가고 다시 월요일을 맞을 마음의 준비는 더뎠다. 귀중한 휴식시간에 무엇인가 의미 있는 경험을 하고 싶었다. 무작정 정동진행 기차표를 끊었다. 책 한권 들고 기차역을 찾았다. 정동진까지 가기 위해서는 오산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청량리역까지 간다음 정동진행 무궁화 호를 갈아타야하는 긴 여정이었다. 당일치기라 도착하자마자 한 두시간 후에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를 타야했다. 왔다갔다 하는 길 자체에 시간을 하루종일 쏟아야 하는 기묘한 여행이었다. 누가 보면 비생산적이고 이상한 여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바다까지 기차를 타고 가는 과정, 기차에서의 시간이 더 중요했다. 정동진 당일치기 기차여행은 목적지보다 가는 동안 기차에서 책 읽기가 중요한 여행이었다.

 

기차에 자리를 잡고 책을 펼쳤다. 청량리에서도 3-4시간은 더 가야 했다. 책을 읽다가 가끔씩 창밖을 무심하게 쳐다봤다. 산이 보이고 논밭이 보이고 나무들이 스쳐갔다. 흔들리며 가고 있는 와중에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자체가 나에게는 환상적이고 의미심장했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기차에서는 오래된 기차의 낡은 냄새가 베어 나왔다. 사람들의 속삭이는 말투가 공기를 채웠다. 나는 책 속 세상에 빠져 있었고 기차는 나를 겨울 바다로 데려가고 있었다.

 

도착해서 잠시 책을 덮고 겨울의 청량한 바닷바람 속을 걸었다. 물 한 방울 섞지 않은 파란 물감이 풀어진 듯 바다는 말갛고 잔잔했다. 바닷가 앞 카페에 들어가 몸을 녹이며 읽던 책을 마저 읽었다. 하루 안에 내가 이렇게 멀리 동쪽 끝 바다까지 오다니! 그것도 혼자서.. 나 혼자 진귀한 모험을 즐기는 것 같아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혼자여도 외롭거나 초라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함께 해주는 여행메이트인 책이 있었다. 책과 같이 공감하고 느낄 수 있으니 친구 같은 존재였다. 마음이 든든했다.

 


또 다른 책 여행은 뉴질랜드행 이었다. 고3 담임을 끝낸 겨울 나에게 3주의 긴 방학이 주어졌다. 고된 1년살이로 지친 몸을 눕힐 어딘가 물리적으로 멀리떨어진 곳에 가고 싶었다. 지체 없이 따뜻하고 먼 장소를 발견했다. 뉴질랜드였다. 여행을 가면 현지 서점을 찾아 둘러보는 것을 좋아했다. 서점에 가면 여행자가 아니라 현지인이 된 기분이었다. 여행자보다 더 깊숙이 그들의 삶으로 들어가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한참 대형서점을 둘러보다가 마음에 드는 제목을 발견했다. “Me Before You". 그 책과 함께 여행을 시작했다.

 

1월의 오클랜드에는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고 있었다. 곳곳에 널려있는 공원 잔디밭에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누워있고 앉아있었다. 그 자유로운 분위기에 반해 나도 어디서나 바람이 닿는 곳에 앉아 책을 펼쳤다. 테카포 호수에서도, 미션베이에서도, 콘웰파크에서도 싱그러운 초록 잔디위에 편히 앉아 책을 읽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을 의식하거나 눈치 보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누구도 눈치 주지 않는 문화가 좋았다. 그 편안한 분위기에 마음이 놓여 책장이 술술 넘어갔다.


마운트 쿡 산장에서 강한 비바람으로 발이 묶여있던 날이었다. 전날 산을 오르긴 했지만 다른 코스도 가보고 싶어서 숙소를 하루 더 연장했었다. 기상조건이 나빠서 트랙킹길은 폐쇄되었고 외진 산골에서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숙소에서 하루를 보내야했다. 그 예기치 않은 불행의 날이 지금까지도 가장 아늑하고 이상적인 하루로 기억되는 까닭은 책과 함께 있어서 였다. 숙소 키친에서 간단한 파스타와 스프를 만들어 먹고 창이 보이는 테이블에 앉아 하루종일 책을 봤다. 오다가다 얼굴을 익힌 숙소 친구들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커피를 함께 마셨다. 다시 혼자 책속에 빠졌다. 밖에는 날카로운 바람이 매섭게 불어 닥치고 있었지만 그날 느꼈던 마음의 평화가 아직도 그립게 남아있다. 책 속의 주인공이 친구가 되어주고 그들의 슬픔과 위로가 책 밖의 나에게까지도 희망과 용기를 전했다.


삶은 살만한 것이라고,

따뜻한 마음은 나누면서 살아가야한다고.


내 삶의 방향이 어디로 나아가야할지 몰라 주저 하는 나에게 책은 어떤 사람보다 큰 의미와 영향을 주었다. 책과 여행은 내성적인 자아와 도전을 꿈꾸는 외향적인 자아가 힘을 합쳐 시너지 효과를 냈다. 책은 여행지에서 황폐해질 수 있는 내면을 다져주고, 여행은 책으로만 채울 수 없는 자연 속 모험의 에너지를 더해준다. 방에서 책만 읽었다면 무기력하고 우울해졌을지도 모른다. 혼자 여행만 했다면 쉽게 지치고 외로웠을 것이다. 여행하며 책을 읽었기에 예상치 못한 사건 속에서 용기와 도전정신을 배웠고 책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내면의 평화를 챙길 수 있었다.

 

여행을 마치고 그 책은 책장 한켠에 고이 놓여있다. 그 책을 보면 뉴질랜드의 광활한 산에서 내려다 본 자연의 경치와 연두색 바람이 떠오른다. 여행지에서 봤던 장면들과 느낌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행복해진다. 나에게 <미비포유>와 뉴질랜드는 어느새 같은 이름으로 남겨졌다.

 


육아를 시작하고 책 여행은 멈췄다. 책을 펼칠 여유는 사라졌고 여행은 더욱 멀어졌다. 떠나고 싶은 마음을 달래려 여행 책을 읽기 시작했다. 첫 아이가 100일때즘 집근처 카페에 혼자 앉아 <아이슬란드가 아니었다면>을 읽었다. 40대 여성이 혼자 아이슬란드로 여행을 가서 트레킹 하는 내용이었다. 몸은 떠날 수 없었지만 여행기를 읽으며 마음은 북유럽으로 가고 있었다. 그곳에서 작가와 함께 길을 걷고 얼음산을 올랐다. 카페에서 2시간쯤 있었을까. 책을 멈추고 고개를 들자 아이슬란드 여행에서 불현듯 현실로 돌아온 것을 자각했다. 잠깐의 카페행이 지친 삶에서 여행이자 휴식이 되었다. 그때부터 여행 책에 손을 뻗었다. <와일드>, <나를 부르는 숲>등을 읽었다. 몸은 아이와 집안일에 묶여있지만 마음만은 책 속에서 같이 걷고 오르며 가상 여행을 실컷 즐겼다.

 

지금은 코로나와 두 아이 육아로 발 묶여 어디로도 떠날 수 없지만, 나는 서점에서 반짝이며 나를 기다리는 책을 볼 때마다 또 다른 여행을 꿈꾼다. 다음에는 오랫동안 읽고 싶어 아껴둔 <걷기의 인문학> 을 들고 제주도로 1박2일이라도 혼자 갔다 오고 싶다. 그곳에서 하루종일 올레길을 걸으며 틈틈이 책을 읽고 싶다. 다음에는 어떤 책을 들고 어디로 떠날까 계획하고 상상하며 오늘도 설레는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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