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덕근 Dec 23. 2019

정체성을 찾아 헤매는 나에게

한때 그런 생각을 많이 해본 적이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책을 읽거나 회사에 다니거나 혹은 여행지에서 본 어느 풍경을 보며 한 번쯤 떠올렸을 법한 질문이다. 우리 각각은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걸까. 대답해줄 수 있는 어떤 존재가 있다면 믿고 의지하면 되겠지만 종교에 귀의하지 않는 나로서는 망망대해를 헤엄치는 기분이다. 그렇다고 그런 해답을 얻기 위해 종교에 귀의하는 것도 뭔가 탐탁지 않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에게 찾아가서 이 질문을 해야 하는 걸까?


한때 소유가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시대가 있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라는 말에 벤츠 자동차 키를 보여주며 대답을 대신한다는 말이 유행할 때다. 그때는 남들보다 좋은 곳에 사는 것이, 많은 돈을 갖고 집을 여러 채 가지고 있던 것이 사회적 부를 표현해주며 그것이 곧 지위이자 나의 정체성을 나타낸다고 생각하는 시절이었다. 지금도 그런 양상은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강남에 빌딩이 있어'라는 말 한마디에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하고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었으니까. 그러나 가진 것이 진정 나의 정체성을 드러내 주고 행복한 삶으로 이끌어줄까.



- 행복한 사람은 소유가 아닌 경험을 통해 정체성을 구축한다


소유로 인해 형성된 나의 인격체는 소유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소유는 내 안의 것이 아닌 언제든 거래가 가능하기에 혹시나 뺏기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게 된다. 만약 하루아침에 사라진다면 그동안 나를 지탱해온 근간이 사라지게 되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소유로 이뤄진 정체성은 행복하지 않다. 행복하고 싶어도 이내 더 많은 것을 소유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경험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여행을 떠올리겠지만 목돈이 필요한 여행 말고도 세상엔 다양한 경험이 지천에 널려 있다. 색다른 음식을 만들어보는 것도, 전혀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것도 경험이다. 경험은 오롯이 개인에게만 국한된다. 내가 가진 경험을 타인에게 빼앗길 일도 없으며, 동일하지 않기에 비교대상도 없다. 똑같은 펜을 사더라도 누군가는 몇 십만 원을 호가하는 볼펜을 사고 누군가는 다이소에서 적당한 가격의 펜을 산다. 전자가 더 행복할까? 그렇지 않다. 행복은 스스로 어떻게 비교하고 느끼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소유를 통해 정체성 결핍을 은폐하지만, 행복한 사람은 경험을 통해 정체성을 구축한다. - <굿 라이프> 중

    

회사에 출근하면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손에 쥐고 왔는가? 그 커피가 추운 당신의 몸을 사르르 녹이며 당신에게 행복을 주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 커피는 유명 브랜드 제품이어서 일까, 아니면 당신이 마시고 싶은 그 타이밍에 커피가 있어서일까. 이처럼 상황에 따라, 맥락에 따라 행복은 상대적이 된다. 그러니 반드시 비싸고 좋은 것이 행복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한다. 비싼 커피를 좋아하는지 저렴한 커피를 좋아하는지, 5월의 어느 봄에 떠났던 그 여행은 유럽이 좋았는지 국내가 좋았는지 등 다양한 기준들이 세워지게 된다. 이런 경험들이 하나 둘 쌓이다 보면 마침내 나만의 기준점이 생긴다. 그 기준점이 바로 나의 정체성을 구축할 중심점이 된다.


나의 정체성을 찾고 싶다면 스스로가 평소에 즐기고 경험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그것들이 한데 모으면 나만의 삶의 철학이 발견되고 그중에 내가 좋고 싫어하는 것들이 가려진다. 채우고 싶은 것이 있고 버리고 싶은 것이 분리된다. 이 모든 작업을 마무리했을 때 당신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눈앞에 있을 것이다. 나의 정체성을 계속 갈고닦을 것인가,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을 것인가. 결국 답은 내 안에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