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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덕근 Jan 04. 2020

꽃이 영원히 피기를 희망했다

한 해가 시작되는 지금, 지난 한 해 동안 해낸 것들을 하나씩 꺼내보았다. 몇 개월 동안 노력하여 겨우내 마친 프로젝트, 타인에게 칭찬받았던 완성된 결과물, 스스로 해내고자 하던 것의 결과물 등 다양한 것들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잊어버릴세라 노트에 적는다. 그리고 그 평가를 보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관점으로 다시 본다. 그리고 '이 정도면 됐어'하며 스스로 납득한다. 


하지만 이 기준은 내 주관적인 관점이다. 주관적인 관점의 문제점은 내가 인정하는 가치를 타인이 공감하느냐 이다. 공감하더라도 그것이 나의 커리어에, 연봉에, 평판에 도움이 되느냐다. 나의 평가를 타인의 입을 통해 듣는다 하더라도 저마다 다른 기준으로 나를 평가하기 때문에 온전할 수 없다. 누군가는 나를 '일 잘하는 사람'으로 볼 것이고 누군가는 '일찍 출근하는 사람'으로 볼 것처럼 다양하기 때문이다. 평가하는 사람은 나를 24시간 관찰할 수도, 나의 사상에 공감할 수도 없으며 오직 나의 특정면만 본다. 그리고 평가하는 사람의 배경지식에 따라 가중치가 변한다.



# 회사에서 인정받기를 희망했다


지난 한 해 동안 일을 정말 많이 했다. 과거 프리랜서를 다닐 때를 비교하면 적어도 2~3배는 끌어올려한 거 같다. 주어진 일만 해도 OK였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내가 덜하면 그만큼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 연구하고 노력해 시스템에 적용해두면 나와 회사가 윈-윈 할 것 이란 걸 알기에 더욱 열심히 했다. 예를 들어 내 입장에선 똑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게 해 얻은 시간 절약이, 회사 입장에선 시스템이 보다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등 서로 이점이 되도록 했다


사람의 마음이 열심히 하면 누군가 알아봐 주고 그에 따른 성과가 오길 희망하기 마련이다. 나 역시 나를 위해서 한다고 했지만 솔직히 그만큼의, 아니 70%의 보상이라도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성과를 같은 업종에 있지 않은 사람에게, 특히 연봉 의사 결정권을 가진 사람을 납득시키기란 어렵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들에게 나는 평가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혹은 내가 한 것보다 다른 방향의 성과를 내주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시스템 안정화, 성능향상보다 매출과 직접 연결된 것에 성과를 기대한다든지 등.



# 인정받고 싶은 나 vs 내가 되고 싶은 나


한동안 멘붕이 오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일 것이다. 열심히 쌓아온 성을 '그런 거 해서 뭐해. 필요 없어'라며 말하는 거 같았다. 아니, 이미 그런 사인을 몇 번이나 받았을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간에 성과에 따른 피드백 대신 침묵이 돌아왔다. 그동안의 나의 노력이 모래성처럼 사라지는 듯했다.


나는 인정받기를 원했던 걸까, 아니면 내가 되고 싶은 나가 되기 위해 노력한 걸까? 두 개가 일치되기를 희망했지만 그러지 않은 현실을 당황하고 분노하며 받아들여야만 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만약 전자의 이유만으로 열심히 했다면 지금도 허무함과 좌절감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동안 해낸 것들을 다시금 돌아보면서 '이 정도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잘했다'라며 다독였다. 매순간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했기 때문이다.



# 안정감에 나를 옮겨놔 안도하고 있었다


회사가 주는 안정감은 달콤했다. 그래서 더 인정받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인정받으면 위로 올라가는 게 쉬우니까. 회사가 주는 시스템에서 언젠가는 '어느 정도 위치를 차지하지 않을까'라며 알게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거 같다. 하지만 나는 회사에 들어오기 전에도 늘 야생화처럼 지냈다. 봉우리 하나를 맺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알고 있다. 활짝 핀 꽃이 영원히 피지 않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온실 속의 나는 영원히 활짝 펴있는, 있을 수 있는 꽃이라 믿었다. 내가 만든 튼튼한 벽돌집도 아닌 타인이 제공하는 유리벽 온실 속에서.


나를 강하게 한 것은 완벽한 환경인 온실 속이 아닌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가뭄을 견디고,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견디고, 뿌리째 날아가버릴 것 같은 강풍을 견디며 섰던 모습들이다. 누군가는 나에게 그런다. 안정적인 직장이 너를 잘, 예쁘게 자라게 만들어줄 텐데 잘 다니라고. 하지만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많은 역경을 이겨내고 온 덕분이라고.




나는 이제 더 이상 꽃이 영원히 필 거라고 믿지 않는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고르는 사람이 아니라 내 인생을 적극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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