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을 타면 다들 한 손에 핸드폰이 들려있다. 대부분 유튜브 또는 인스타그램을 보고 있다. 유튜브야 그렇다 하더라도 인스타그램은 왜 그리 많이들 볼까? 지금 이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인스타그램을 보고, 사진을 올린다. 어제 먹은 맛있는 스파게티를 올리고, 지난달 다녀온 유럽여행에 태그를 붙여 올린다. 무엇이 그들의 행동에 동기를 불어넣는 걸까?
<어디서 살 것인가>의 저자는 이를 소유에서 경험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소개한다.
과거에는 어느 동네 몇 평짜리 집에 살고 어느 차를 모느냐로 자신을 드러냈다. 곧 내 소유물의 스펙이 나를 드러내는 전부였다면 지금은 SNS에 올리는, 내가 방문한 카페의 사진과 여행 간 호텔의 사진으로 내 공간을 만들어서 나를 표현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나는 내가 소유한 공간으로 대변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소비한 공간으로 대변된다. - <어디서 살 것인가>
뭐든 소유하는 것에 열광하는 시대가 있었다. 2009년 그렌저 광고가 대표적이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친구의 말에 그렌저로 대답했습니다.'. 이 짧은 문구가 그 시대상을 한 번에 알아차리게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EAAxbJ-Iv3M
그땐 비싼 고급 상품이 나를 대변해주는 것 같았다. 아니 한 단계 위로 올려주었다. 그래서 비싼 명품이 인기 있는 한편, 한 곳에선 그런 문화를 풍자하는 단어도 생겼다.
그런데 지금 그 단어들이 많이 사라졌다. 그들의 명품이나 스포츠카는 여전히 부럽긴 하지만 더 이상 이전만큼 부럽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런 비싼 것들이 나의 정체성을 증명한다고 생각하기보다 내가 무엇을 경험하느냐에 나를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험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그렇다 바로 사진이다.
동영상은 너무 무겁다. 게다가 편집하지 않으면 날것 그대로 드러날 위험이 도사린다. 보는 사람에게도 부담이다. 분량이 긴 영상은 왠지 손가락을 머뭇거리게 한다. 하지만 사진은 간단하다. 손가락 몇 번 터치하면 순식간에 멋진 사진으로 변신해 인터넷으로 올라간다. 나의 경험이 멋진 필터와 함께 올라가는 것이다.
인스타는 경험을 소유하게 한다. 나의 멋진 경험을 증명한다. 그래서 인스타그램에는 나만의 공간이 있다. 그곳에는 내가 보여주고 싶은 멋진 나만이 존재한다. 그래서 그곳은 대중적이면서 완벽한 개인적인 공간이 된다. 현실은 10평짜리 원룸에 살지 몰라도 인스타그램 속에서 나는 어떠한 제약도 없는, 무한한 가능성이 열린 나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