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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덕근 Feb 13. 2020

나이들어 다시 본 <슬램덩크>

예전에 지인에게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좋은 책은 오래오래 두고 보는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서 느끼는 게 달라지거든요.'


당시 읽고 있던 책은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였다. 철학에 빠져있던 터라 관련된 서적은 닥치는 대로 읽었다. 철학을 전공할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열심히 본 이유는 내 삶을 통째로 바꿔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게임으로 점철된 내 인생을 뒤로하고 고른 게 책이었고 그중 철학부터 보기로 했다. 인문학이 열풍이라 영향을 받은 것도 한몫했다. 이제 와서 솔직히 말하면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반도 이해 못한 것 같다. 그렇게 지루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러던 와중 지인에게서 그 말을 들었다.


그때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실제로 같은 책을 다시 보면 안 보이는 게 보이기도 했으니까. 같은 책을 다시 보면서 그분이 했던 말이 조금씩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심금을 울릴만한 사건은 없었다. 그런데 최근 슬램덩크를 보면서 그때 말하신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 다시 읽은 <슬램덩크>


슬램덩크를 말하면 대부분 명작이라고, 다시없을 만화라고 손꼽는다. 나 역시도 어릴 적 매일 밤 슬램덩크를 읽는 재미에 푹 빠졌다. 어릴 적에 봤던 슬램덩크는 개성도 있고 사연도 있는 5인이 나와 도저히 이 길 가능이 없어 보이는 경기를 하나씩 이겨내는 모습에 열광했었다. 매 경기마다 불가능해 보이는 도내 강자를 쓰러뜨리는 것을 보며 감동을 넘어 희열을 느끼게 했다.


최근 다시 본 슬램덩크는 모든 것이 새로웠다. 분명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이었는데 말이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 뭐가 새롭냐고 말할지 몰라도, 그 안에는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겪었던 힘들 때의 감정과 극복,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쳐나가면 좋을지 보여주는 작은 드라마 같았다. 이것은 분명 어릴 적 보이지 않았던 관점이었다. 무엇이 그들을 불타오르게 했는지, 극도의 긴장과 피로감에서 어떤 생각과 행동을 하는지, 어떤 플레이가 지친 모두에게 힘을 불어넣는지를 유심히 지켜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나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에 대해 시선이 쏠렸다.


- 다시 본 책이 감동을 주는 이유는 삶과 닮았기 때문이다


살면서 누구나 힘들 때가 있다. 인간관계, 잦은 실패, 한계 등 다양하다. 그리고 힘든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도 저마다 다양하다. 누군가는 전문가와 상담하고, 누군가는 책을 보면서 위안을 얻고, 누군가는 상황을 극복하고자 초인적인 노력을 한다. 이 모든 것에는 정답이 없다. 다만 자기에게 잘 맞는 것이 있을 뿐이다.


슬램덩크는 그런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능남팀의 주장이지만 채치수를 상대로 골을 넣는데 자신이 없던 변덕규는 순간 윤대협 -> 황태산으로 공을 돌려 득점한다. 그때 변덕규는 생각한다.


우리에겐 점수를 따낼 수 없는 녀석이 있다.
내가 30점, 40점을 넣을 필요는 없다.
난 팀의 주역이 아니라도 좋다!!


그의 독백은 마치 내게 말하는 듯싶었다. 나는 항상 '모든 것을 잘해야 한다'는 마인드를 갖고 살았었다. 그런데 몇 년 전 사건을 계기로 나는 내게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못하는 것을 못하는 대로 두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팀에 성과를 내는데 모든 팀원이 마케팅을 잘할 필요도 없고, 모두가 기획을 잘할 필요도 없다. 그저 자기의 위치에서 전문성을 갈고닦으며 필요에 따라 협력하면 되었다. 덕분에 강박에서 탈출할 수 있었고, 좀 더 유연하게 일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타인에게 기대도 좋고, 나 역시도 타인의 기대로 일을 해낼 때가 있으니 말이다.



- 감동은 스토리를 동반한다


몇십 년 만에 다시 본 슬램덩크는 내가 지금껏 봐온 많은 자기 계발서의 실사판처럼 보였다.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았던 것들이 캐릭터를 통해 상세히 설명해주는 듯했다. 일례로 재능보다는 노력이 어떻게 재능을 극복하게 하는지 보여주는 것이 있었다.


슈터에게는 확실히 재능이 필요하다. 중학 MVP를 따낸 정대만에겐 그 재능이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진정한 슈터는 연습에 의해서만 만들어진다. 끝없는 반복 연습만이 슛의 성공률을 높일 수 있다. 신준섭은 그때부터 하루 500개의 슛 연습을 거른 적이 없다.


매일 슛 500개를 연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독자를 매우 따분하게 할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3점 슛을 해낸 캐릭터를 보여준 후 '그 뒷배경에는 매일 슛 500개의 연습이 있었다'라는 말은 묘한 감동을 준다. 하지만 일상은 매일 슛 500개를 해야 하는 따분함을 준다. 슛 연습 500번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매일' 슛 연습 500번은 경이롭게 한다. 그리고 그 경이로움이 기적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그것을 기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당사자에겐 그게 기적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보는 나는 그것이 기적으로 보였다.




'나는 지금 기적을 만드는 길에 서 있는가'


매일 아침 일어나 내게 하는 질문이다. 무엇을 위해 기적을 만드는가 라는 질문이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명확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하더라도 열심히 노력하는 것에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주인공인 강백호를 보면서 알게 되었다. 그는 고등학교에서 처음 농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4개월 만에 팀에서 빠질 수 없는 주력 멤버가 되었다. 상식적으로 농구를 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라는 질문을 해보면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신체능력과 남다른 반사신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래서 농구의 기초인 드리블부터 하나씩 착실히 익히니 금세 그는 팀의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가 되었다.


항상 목표지향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빨리 정해야 한다고 독촉했다. 하지만 고민은 해결되지 않았고 같은 질문을 계속 반복하게 했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그 시간이 얼마나 아쉬울까 라는 생각이 들었고 뭐라도 해보자 하면서 이것저것 하는 것들이 있다. 가끔은 그런 저돌적인 모습이 미래의 나와 어떻게 연결이 될지 궁금할 때가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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