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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덕근 Jun 09. 2020

슬기로운 출장생활

매일매일 같은 일상을 살았던 내게 조금 변화가 생겼다. 출장이라는 이벤트로. 


이전까지 나는 매일 아침 4:30분에 일어나고 5:30에 첫차를 타며 6:15에 회사에 도착하고 하루 할 일을 정리하고 책을 펴 읽다가 일을 시작하는, 정해진 시간에 할 일을 딱딱 맞춰서 하는 어찌 보면 딱 맞는 옷을 입은듯한 생활이었다.


출장에서의 생활은 일상과 많이 달랐다. 우선 회사에 이동할 대중교통이 없기 때문에 차가 움직이는 시간에 맞춰야 했다. 그 시간까지 방에서 대기해야만 했다. 책상 대신 작고 둥근 테이블이 자리 잡아 있고 방안에 불은 들어오지만 책을 읽기에는 조금 어두운, 스탠드 같은 편의시설 역시 없는 곳에 매일 아침을 맞이한다.


이전까지만 해도 다른 환경에서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일주일 동안 평균 일어나는 시간은 6시였으며 때론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해 미적거리다 7시를 넘긴 적도 있다.


2년 넘게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담배를 끊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결정적인 순간 한번 무너지면 쉽게 예전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라고 말하던 지인이 생각난다. 마치 2년 넘게 만들어온 습관이 한여름밤처럼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분명하게도, 나는 이런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저 잠자리가 바뀌었을 뿐인데 왜 안 되는 걸까? 그러나 실제로 바뀐 것은 잠자리뿐만은 아니었다. 내게는 암묵적으로 보이지 않던 지켜야 하는 약속들이 있었다. 첫차를 타야 한다는 약속, 회사에 일찍 가야 한다는 약속, 아침을 잘 보내고 싶다는 약속 등. 그것들이 모두 똘똘 뭉쳐 하나의 습관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일주일이 지난 후부터 였다.


나는 왜 아침형 인간이 되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해야만 했다. 그저 좋기 때문에 한다고 하기에는 조금 과한 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4:30분에 일어나는 것과 6:15에 회사에 출근한다는 것은 정상적인 범주는 아니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럼에도 약 2년 동안 그리 한 이유는 하루하루를 더 의미 있게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장이라는 변수는 이 의미를 잊게 만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의미 따위 진작에 잊어버리지 않았나 싶다. 이미 충분히 몸에 밴 습관엔 의미를 떠올리기보단 행위만 남아있었다. 아무리 재미있는 것을 하더라도 그것이 습관이 되고 일상이 되면 의미는 금세 잊기 쉬운 거 같다. 어떤 숭고한 목표라 하더라도 지속적으로 상기하지 않는 한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이벤트에 치여 목표 따위 쉽게 잊는 존재이니 말이다.


사람은 나약한 존재다. 언제든 쉽게 공포감에 휩싸인다. 나는 그 과정의 첫 번째를 일어나지 않을 일을 상상하며 두려워하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본다. 이번에 찾아온 두려움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는데 내 생활패턴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였다. 하지만 이내 이런 생각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지에 집중했다. 다행히 자기 계발 덕후답게 답이 나왔다. 첫 알람이 울리면 가볍게 몸을 움직여 잠을 깨도록 하고, 소소한 할 일을 만들어 두는 것이었다.


이것은 정말 효과가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침대에 걸터앉아 명상을 했다. 타이머를 10분에 맞춘 뒤, 유튜브에서 명상음악을 켰다. 비몽사몽 한 상태로 시작했지만 하면 할수록 머리가 맑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딱 10분만 버티면 되었다. 그 이후부터는 평소 하던 습관처럼 운동을 시작했다. 사소한 트리거로 나는 금방 이전의 생활을 찾을 수 있었다.


얼마 전 시즌1이 종료된 <슬기로운 의사생활> 이후로 '슬기로운'이라는 수식어가 여기저기 붙는 게 유행이 되었다. 나 역시도 '슬기로운 출장생활'이라는 장난 반 섞인 이름으로 망가진 일상을 어떻게 회복해나가는지 기록한다.


우리는 일상이라는 끊이지 않는 연속선상 위에 살고 있다. '슬기로운'의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조건은 어떤 대단한 노력이나 성취는 아닌 듯하다. 사람은 저마다 크고 작은 문제점을 갖고 있고 매일 그것들을 조금씩 극복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매일을 극복해가며 사는 우리는 분명 슬기로운 일상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믿는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린 원래 그런 존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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