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보다 좀 더 젊을 적엔 진리라든가, 옳음을 추구하며 살았다. 현상보단 근본이나 원인에 대해 더 많이 관찰하고 관심 갖던 시절이었다. 때문에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사건에 대한 상황과 경황을 보기보다는 원인과 구조적 문제를 파악하는데 힘썼고 이면을 잘 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옳음을 추구하는 것과 그것을 실행하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엄마가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할 일이 있었는데 생명에 위협이 갈 정도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좀 더 기운을 빨리 회복하길 바라는 마음에, 그리고 빨리 우울감에 벗어나기 위해 별거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말이 엄마에겐 서운함으로 다가갔다.
취업을 힘들어하는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가 취업을 못하는 이유는 자명했다. 어떤 경험이나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있겠지만 적어도 외관적으로 보이는 노력과 행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친구에게 돌직구로 지적한 적이 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공감보다 분노였다.
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과자를 먹으면 건강에 해롭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과자를 사 먹는다. 먹고 나면 속이 불편할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언제부턴가는 스스로 합리화를 하면서 먹었다. 끼니 대신 먹는다든가, 스트레스를 받아서 먹는다든가 등 다양한 이유를 갖다 붙였다.
당사자는 무엇이 옳은 것인지 대체로 안다. 그러나 아는 대로 행동하지 못한다. 이 간극은 어디서 오는 걸까 라고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감정으로 귀결된다. 평온한 감정상태라면 과자 유혹에도 쉽게 뿌리칠 수 있다. 하지만 감정이 격하거나 크게 출렁이게 되면 과자 유혹을 쉽게 떨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 순간 나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은 감정이고 감정이 고르는 선택지에는 옳음이 없을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선택하는 존재다. 모든 것을 고려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인간의 인지능력은 수많은 선택지를 한 번에 기억하고 가중치를 매길정도로 똑똑하지 않다. 다만 최대한의 노력할 뿐이다. 인간이 정말 합리적인 존재라면 우리는 위와 같은 괴리를 겪지 않을 것이다.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맞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
지금도 옳음을 추구하느냐 라고 묻는다면 반은 그렇고 반은 그렇지 않다. 그때는 고려하지 않았던 마음 상태, 즉 감정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누군가를 또는 스스로를 설득하려면 진실과 동기부여를 반씩 섞어줘야 한다. 진실은 목표를 잡는데 도움이 되고 동기부여는 감정적인 부분을 잡는데 도움이 된다. 둘은 서로 배척되는 관계가 아니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로 발전시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