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만 좀 나대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축약해보면 그런 행동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불편하게 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대체로 그런 말을 어디서 듣는가 생각해보면 부모님, 친구, 직장동료 사이에서 듣는다.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나와 많은 시간을 보냈거나, 내가 보내는 시간의 대부분을 함께 보내는 사람이란 점이다.
나와 가까운 사람일수록 내가 평소에 하지 않는 어색한 행동을 이상하게 본다. 그러고는 '너 왜 그래?' 라며 지적한다. 그 말을 듣는 나는 '이게 이상한가?'라는 생각을 하며 위축되고 행동을 자제하게 된다. 객관성은 묘하게 힘이 실린다. 그래서 '저 사람이 하는 말이 맞겠지'라고 생각하게 한ㄷ.
똑같은 행동이라 하더라도 상황에 따라, 그리고 누가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내가 하면 어색해서 한소리 듣는 행동이, 타인이 하면 자연스럽고 익숙하다. 내가 하면 지적을 받고 친구가 하면 잘했다고 칭찬을 받는다. 어딘가 이상하단 생각이 드는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들은 되고 나는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만들어 붙이기만 하면 밤새 붙일 수 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기대하지 않은 행동이 불편하거나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기 때문이다. 불편한 감정은 상황을 빨리 종식되길 원하고,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으로 지적을 선택하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상황이 얼마나 불합리한지 안다. 그들이 나를 생각해주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방법이 잘못되었다. 우리 모두는 타인에게 대하는 데 서툴다. 서툴지만 전문가처럼 대하려고 폼 잡는다. 혹은 '객관적으로 보는 관점이 맞다'는 알수없는 합리성에 빠진다. 그 함정이 우리를 괴롭힌다.
세월을 살다보니 나대야만 얻을 수 있는 게 있음을 안다. 나댄다는 것은 사실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의미기도 하다. 참여는 경험을 만들고 경험은 피드백을 동반한다. 좋고 아님은 그 다음에 판단하면 될 요소다. 하지만 대부분 타인의 목소리에, 혹은 내면의 목소리에 시작하길 멈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의 경험을 위해 무분별하게 나대야 하는 걸까? 아니면 주변과의 조화를 생각해 일단 참아야 할까? 해답은 나대야 할 곳과 그렇지 말아야 할 곳을 구분하는 것이다.
내가 게임을 좋아한다 했을 때 내 주변 사람들이 게임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다면 게임을 좋아하는 티를 내는 것보다는 다른 화두로 이야기하는 게 낫다. 대신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을 찾아가 마음껏 이야기하면 된다. 서로 공감대가 형성되기 쉽고, 이야기가 잘 통하며 깊이를 더할 수도 있다.
내가 가진 즐거움이나 경험을 죽여가면서 타인과 어울리는 것보다 나의 경험을 어떻게 확장할 것인지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이 보다 의미 있다.
사회는 경험을 많이 하라고 종용하지만 실상 우리가 하기 힘든 이유는 우리의 의지가 부족해서 라기 보단 '그건 좀 아니지 않으냐'라는 식의 외부 시선이 더 크다. 그들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경험해본 것일 수도 있겠지만 뇌피셜일 가능성이 더 크다.
그들은 나에 대해 완전히 잘 알고 있지 않다. 때문에 똑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경험과 나의 경험은 온전히 같을 수 없다. 이 차이를 모르는 사람이 타인에게 틀에 박힌 경험을 유도할 수 밖에 없다. 어색함을 이겨낼 힘이 없는 것이다.
인간이 현명해지는 것은 경험 때문이 아니라, 경험에 대처하는 능력 때문이다
- 버나드 쇼
거부당하더라도 연연하지 말고 이동하여 다시한번 해보자. 누울 곳을 보면서 다리를 뻗어야 한다는 속담처럼 내가 할 행동과 어울리는 곳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이 나쁜 게 아니라 서로 이해가 다르다는 것만 알고 고개를 끄덕이면 된다. 그리고 내가 진정 가야 할 곳으로 이동해 활동해야 내 경험이 확장되고 삶을 풍요롭게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