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를 가지 않은 탓에, 아니 딱히 휴가를 쓸 이유를 찾지 못해 연차가 제법 쌓여있다. 인사팀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내가 연차를 다 쓰길 원하는 것 같다. 최근 관련 이야기가 한번 나오기도 했었고. 사실 그쪽에다가 이야기하지 않은 게 하나 있는데, 내게는 몇 차례 새벽 근무로 인한 대체휴가도 제법 있었다. 제때 쓰지 않아 모두 소멸되긴 했지만 아마 그것들도 기한이 없었다면 인사층에서 나를 한층 더 달달 볶았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성격이 특이하다. 이전부터 알곤 있었지만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 더욱 두드러진 느낌이다. 다닌 1년 동안 휴가 하나 제대로 안 쓴 나를 보며 '그래도 쉬면서 하는 게 좋지 않으냐'라든가, '어디 좀 놀다 와라'라는 말을 건넨다. 그들이 나를 생각해주는 것은 고마우나 나는 정말 휴가를 쓸 이유를 찾지 못했다. 휴가를 내면서까지 해야 할 하고 싶거나 가고 싶은 곳이 없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휴가를 내서 다녀오는 게 맞지만 그런 게 없으니 휴가를 낼 이유를 못 찾는다.
누군가는 내게 그런 경험이 없으니 그런 거 아니겠냐고, 그러니 더욱 적극적으로 가봐야 하는 거 아니겠냐고 하지만 반대로 그런 경험을 왜 꼭 해야 하는 것인지, 필요할 때가 되면 가지 않겠느냐고 한다. 기회가 올 때 가지 못하면 영영 가지 못하는 게 여행이라 하지만 잘 살펴보면 여행 패키지도 잘 되어있고 항공도 많으며 다양한 방법으로 여행지를 알아볼 수 있다. 지금처럼 회사에 휴가를 받을 수 있다면 떠날 수 있는 게 여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휴가를 못 받는다면 그만두고서라도 다녀오면 되니까 라는 생각에 여전히 여행이 끌리지 않는다. 젊은 날에 떠나는 게 좋다고 하는 누군가의 말도 동의가 잘 안 된다. 내 삶에 진정 영향을 끼치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라면, 혹은 충동적으로 부딪히는 경험들을 느끼기 위해서라면 그게 꼭 젊은 날에 해야 한다는, 혹은 어릴수록 유리하다는 일종의 공식 같은 말은, 실상은 나이와 관계없이 다가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년 일본 여행에서 텅 빈 커피숍에 혼자 앉아 멍하니 보냈던 시간들, 이방인으로써 사람이 북적이는 어느 아키하바라의 카페 안에 혼자 앉아 사람들을 관찰했던 경험들이 아직 머릿속에 생생하다. 그곳에서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난다. 커피맛이 어땠는지도 기억이 난다. '여기는 서비스가 좀 그런데'라는 기억도 난다. 그런데 그때 한 생각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 한 생각은 나의 어느 노트에 고스란히 담겨있지만 그 노트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여행이란 거대한 망각의 덩어리처럼 느껴지기도 하다. 그래서 어렴풋이 기억은 나는데, 명확하지 않다. 느낌만 살아있다.
그 일본 여행에서 가장 큰 수확은 나의 색이라는 것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여행 마지막 날 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친구들에게 자문을 해보니 아무 술집에 들어가 꼬치에 맥주 한잔 하라는 이야기를 해줬다. 나는 골목골목마다 위치하는 자그마한 술집을 몇 번이나 지나치다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한참을 서성이다가 결국 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하지 않았다. 그것은 나다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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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가면 좋을 거 같단 막연한 생각으로 베스트셀러에 있는 김영하의 산문 <여행의 이유>를 읽어봤다. 사람들이 말하는 여행, 보편적인 여행이 아닌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기에 책을 펴보았다. 책을 읽는 동안 작년에 읽었던 <나는 바람처럼 자유롭다>가 떠올랐다. '뼈저리게 낯선 것들을 충격적으로 만나기 위한 여정'을 위해 기꺼이 고생을 감수하는 것. 여행을 하는 이유는 그런 경험을 위한 것이라고 다시 한번 상기하는 듯하다.
여행은 일상에서 결핍된 어떤 것을 찾으러 떠나는 것이다. 우리가 늘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뭐하러 그 먼길을 떠나겠는가. 여행지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여행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 <여행의 이유>
정체성이 비교적 뚜렷한 일상에서 벗어나 아무것도 아닌 나를 마주하러 가기 위해 떠나는 여행. 저자의 말처럼 여행을 떠나는 이유가 아무것도 구속하지 않는 이색적인 곳에 머무는 것이라면, 그것은 굳이 여행이 아니라 하더라도 할 수 있다. 지난 추석 연휴 때 나는 3일 동안 아침 일찍 카페에 가서 앉아 있었다. 휴일이라 그런지 연락이 거의 없었다. 한술 더 떠 핸드폰을 꺼서 알림을 모두 차단해 버렸다. 그때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다. 한국사람이기에 최소한의 어떤 것은 있었겠지만 나에게 주어진 환경은 거기까지 였다. 서로 얼굴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내가 커피를 들고 가다가 넘어져 왈칵 쏟아도 모른 척할 사람들이 거기 있었다. 나 역시 철저하게 그런 역할을 해냈다. 타인을 신경 쓰지 않았고, 그러나 때론 타인을 관찰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아무런 방해 없는, 어쩌면 여행에서 말하는 해방감을 나는 카페의 어느 구석에 있던 의자에 앉아 느끼고 있었다.
여유는 필요하다. 여유가 있으면 평소 생각지 못한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날 머물었던 카페에서 앞으로의 방향성과 반년 후, 1년 후, 5년 후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지난 활동에서 내가 어느 것을 중점에 두며 활동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잊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했으며 그래서 앞으로 어떤 것을 하면 좋을지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여행이 주는 것이 여유라 한다면, 그것은 내가 여유를 느낄 장소를 찾아가거나, 그런 방법을 채택하면 되었다. 그 방법이 반드시 '여행'이라는 도구일 필요는 없었다. 만약 여행이 이런 이유라면 카페에서 보낸 3일은 내게 여행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여행의 이유>를 덮고 다시 한번 여행의 이유에 대해 생각해본다. 저자가 말한 바는 너무 많이 와 닿아서 감탄하며 보기도 했지만, 거기까지 였다. 그래도 저자가 소개한 한 구절은 울림이 강했다.
고통은 수시로 사람들이 사는 장소와 연관되고, 그래서 그들은 여행의 필요성을 느끼는데, 그것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다.* * 데이비드 실즈,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 김명남 옮김, 책세상, 2014, 87쪽.
'나의 슬픔을 몽땅 흡수할 것처럼 보이는 물건'은 내 주변에 너무 많다. 어떤 것은 가방에 넣어 가지고 다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든지 그것들에 해방될 수 있다. 집에 놓고 올 수 있고, 핸드폰의 모든 알림을 꺼놓고 다닐 수도 있다. 그런 이유들로는 내게 여행을 떠나야 하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휴가가 2주밖에 안 남은 지금도, 나는 여행을 갈까 말까 고민하고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분께 묻고 싶은게 있습니다. 당신에게 있어 여행의 이유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