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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덕근 Nov 10. 2019

군중 속에서의 나만의 공간

최근 우연히 들은 노래가 있다. 2017년 개봉한 [위대한 쇼맨]에 수록된 곡 중 하나인 This is me 란 노래다. 다수로 구성된 정상이라는 표준치에서 벗어난 외모를 가진 이들이 받은 차별과 조롱을 이겨내고 이제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당당하게 살아가겠다고 다짐한 노래이다. 처음 들어본 이후로 뮤직비디오를 수십 번 보고 노래를 넣어두어 몇 시간씩 듣고 다녔다. 그러다가 어제는 [위대한 쇼맨]을 다시 보았다. 이전에도 한 번은 본 건데 다시 보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 [위대한 쇼맨] 중


인간은 구별 짓는 것에 익숙한 존재다. 그게 어떤 선하거나 악한 마음에 비롯하기보단 구분 짓는 자체가 매우 익숙하다. 친구를 구분하고, 가족을 구분하고,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는 등 수많은 구분 짓기를 끊임없이 한다. 몇몇은 생존과도 매우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다음부터다. 구분 짓고 나서 어느 한쪽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이 들게 되면, 그리고 대상이 약자일 경우 괴롭힘으로 이어지게 된다. 약자를 괴롭힐 때에는 내편이 많아야 한다. 나의 생각에 동조해주는 그룹이 있다면 타인을 비난하는데 용감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괴롭힘은 엔터테인먼트로 발전하게 된다. 내편을 위해, 봐주는 관객을 위해 더 과감한 짓을 시도하게 된다. 학원폭력을 보면 누군가를 괴롭히는 입장은 다수이고, 괴롭힘 당하는 대상은 소수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군중 속에 나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는 데는 많은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내가 가진 의외성을 누군가가 보고 놀리거나 외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다양성을 외치고 서로의 취향을 존중해줘야 한다고 말하는 사회지만 아마 이런 압박을 완전히 해방하진 못할 것이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그러니까. 자신의 모습을 표현하는데 많은 용기가 필요한 사회다. 사람으로 구성된 사회는 늘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럼 그들은 어떻게 용기를 되찾을 수 있었을까? 


[위대한 쇼맨]을 보면 그런 소수자들을 모아 서커스를 벌인다. 타인에게 내비치고 싶지 않은 모습을 서커스라는 마련된 무대에서 마음껏 펼쳐 보였다. 처음에는 그들 스스로도 반신반의했지만 그들을 보며 신기해하고 즐거워하는 관중들을 보면서 점점 자신감을 얻게 된다. 그들이 가진 부끄러움은 적어도 그 공간에서만큼은 슈퍼스타로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알았다. 그들, 소수자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어떤 보호나 틀에 박힌 동정심이 아니라 그들이 정말로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느끼게끔 하는 것이란 걸 말이다.


사람은 스스로에게 관대하다고 하지만 적어도 관계를 맺는 부분에선 스스로 관대하지 못한 듯하다. 사회 속의 개인은 타인의 시선과 관심을 받길 원하고, 인정받길 원하는 욕구가 있다. 그들이 위축되어 있었던 이유는 사회의 그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할 존재들이라는 것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받은 시선과 조롱으로 인해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을 마침내 '비정상'이 아니라 '특출 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라고 봐주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서커스라는 곳을 통해서.


이미 수십 번도 더 들은 노래가 끝나갈 무렵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나만의 공간은 어디에 있을까. 어쩌면 그 공간에서 누군가는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하고. 아무것도 없다고 믿는 것보다 이런 희망이 가끔은 사는데 도움이 되니까.




https://www.youtube.com/watch?v=h2TLNdaQkL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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