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지인으로부터 통역 의뢰를 받았다. “1박 2일간 한·일 고등학교 교류행사가 있는데, 통역 한번 해봐.”
감사하고 기쁜 마음에 “해보고 싶어요”라고 대답했다가, 며칠 후 대답을 번복했다.
“언니, 못 할 것 같아요. 경험도 없는데 괜히 행사 망치면 어떡해요”
통번역사가 되고 싶어 40대 중반에 하던 일을 잠시 접고, 교토로 왔다.
일본인과 일상을 공유하고, 안부를 주고받고, 함께 여행하고, 일본 사회 전반을 들여다보며 토론하고, 통번역 관련 지식을 배우고, 실전에 대비해 끊임없이 연습하는 생활의 반복.
이렇게 2년을 하면 부족하긴 해도 통번역의 세계에 조금은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며, 간사이 공항으로 향한 것이 1년 반 전의 일이다.
그러나 2024년 4월 일본어 학교에 입학한 후 정확히 하루 만에 깨달았다. しまった!(망했다!)
일본어 학교는 인원부족으로 상급반이 편성되지 않았고, 각국에서 온 학생들의 일본어는 ‘더듬더듬’. 하고 싶은 말은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고, 선생님의 일본어는 아이들을 대하듯 단순하고 친절했다.
1년 동안은 꼬박 이 학교를 다녀야 했다. 통번역의 세계는 점점 멀어져 갔다.
「걱정하지 마라. 슌스케. 너의 피가 너를 지켜줄 것이다.」
「키쿠오. 네가 이곳에 들어온 이후 7년 동안 넌 하루도 쉬지 않고 연습했다. 머리는 잊어도 몸은 춤추고 있을 것이다」
처음으로 큰 무대에 서게 되는 슌스케와 키쿠오에게 슌스케의 아버지이자 그들의 스승이며, 가부키의 거장인 한지로는 이렇게 말한다. 가부키를 위해 그들이 쌓아 온 시간을 알기에 한지로는 그들의 무대를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영화 ’국보(国宝)‘의 한 장면이다.
가부키(歌舞伎)는 17세기 초반 교토에서 시작되었다. 노래, 춤, 연기로 구성된 일본의 전통극으로 현대의 뮤지컬과 비슷하다. 화려한 무대 구성과 의상은 뮤지컬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극도로 절제된 움직임과 창법은 지극히 일본적이다.
현재 일본에서는 가부키를 다룬 영화 ’국보‘가 지난 6월 개봉 이후 끊임없이 화제가 되고 있다. 애니메이션 강국 일본에서 실사 영화가 약 1000만 관객의 흥행몰이를 하는 것은 2003년 개봉된 영화 ‘춤추는 대수사선’ 이후 처음이라고 한다.
가부키는 에도시대(1603년∼1868년) 도시 시민계급을 중심으로 발전해, 2008년에는 유네스코 지정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가부키 배우는 남성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에도시대 초중반부터 풍기문란을 이유로 여성의 가부키 활동이 금지된 까닭이다. 이후 여자역을 하는 남자 배우들은 ‘온나가타(女形)’라 불리며 가부키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다.
영화 ‘국보’는 ‘온나가타’ 가부키 배우로서 인간 ‘국보’가 되기까지 키쿠오의 50년 인생을 보여준다.
하얗게 얼굴이 분칠 되고 무대에 서는 순간 ‘키쿠오’는 사라진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몸, 미끄러지듯 이동하는 걸음, 섬세한 손끝과 살짝 기울어진 고운 자태. 무대 위에는 ‘정월(正月)’ 같이 하얀 여성이 탄생한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너의 피야. 어떤 순간에도 너를 지켜줄 가문의 피. 그런 너의 피를 한 사발 마시고 싶어”
거장 한지로의 역을 이어받는 중요한 무대를 앞두고 키쿠오는 긴장으로 몸을 떨며, 슌스케에게 읍소한다.
혈통·가문 중심으로 세습되는 가부키 세계에서 야쿠자의 아들 키쿠오가 무대에 서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다.
그러나 키쿠오의 무대는 압도적이다. 무대에서 그를 지켜주는 것은 ‘피’가 아니라 그가 흘린 ‘땀’이다.
영화는 슬프고 아름답다. 키쿠오가 보낸 시간들이 깊게 슬프고, 슬픈 시간이 만들어 내는 무대는 시리게 아름답다. 정월(正月)처럼 순백이다.
자신을 믿는다는 것은 타인을 믿기보다 어렵다. 스스로 보내온 시간에 스며있는 슬픔의 농도를 정확히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제 나의 시간들을 믿어보기로 했다.
“망쳐도 괜찮아. 경험이야. 할 수 있어”라는 지인의 호방한 격려와 나의 여린 믿음은 “통역, 해볼게요”라는 하얀 도전으로 이어졌다.
사진 출처 : https://kokuhou-movi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