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볼턴의 <그 일이 일어난 방>을 읽고
1. 서론: 백악관 웨스트 윙 ‘방’ 안에서 벌어진 두 세계관의 충돌
존 볼턴은 트럼프 행정부 1기 시절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재임하며 백악관의 가장 은밀한 결정이 내려지는 ‘그 방(The Room)’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가 펴낸 회고록 《그 일이 일어난 방》은 단순히 정책 결정의 뒷이야기를 폭로하는 서적을 넘어, 수십 년간 미국 외교사를 지배해온 ‘네오콘(Neo-con, 신보수주의)’적 가치관과 트럼프라는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적 이단아가 충돌하며 빚어낸 거대한 파열음을 기록한 사료다. 볼턴은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이 저지른 두마 화학 테러 대응, 이란 핵협정 탈퇴, 그리고 세기적인 북미 협상 과정을 복기하며, 자신이 목격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깊은 환멸과 실망감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2. 볼턴의 렌즈로 본 트럼프: 지도자 자격에 대한 네 가지 심판
볼턴은 트럼프를 "국가 이익보다 개인의 정치적 이익을 앞세우며, 전략적 일관성이 결여된 지도자"로 규정한다. 그가 제시한 트럼프에 대한 비판적 평가는 크게 네 가지 관점으로 수렴된다.
첫째, 의사결정의 ‘사유화’와 거래적 외교다. 볼턴은 트럼프가 국가 안보의 엄중한 과제들을 자신의 재선이라는 사적 목표를 위한 도구로 전락시켰다고 비판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거래다. 볼턴은 트럼프가 시진핑에게 자신의 표밭인 농촌 지역의 지지를 얻기 위해 미국산 농산물을 다량 구매해달라고 간청하는 모습에서 큰 충격을 받았음을 고백한다.
또한, 이른바 ‘우크라이나 스캔들’은 이러한 사유화의 정점이다. 트럼프는 의회가 승인한 약 4,600억 원 규모의 군사 원조를 지렛대 삼아, 당시 정적이었던 조 바이든과 그의 아들 헌터 바이든의 부리스마(Burisma) 관련 의혹을 조사하라고 우크라이나 정부를 압박했다. 볼턴은 이 과정에서 루디 줄리아니와 같은 비공식 라인이 정통 외교 채널을 오염시키는 상황을 ‘마약 거래(Drug Deal)’에 비유하며 강력한 반감을 드러냈다. 이는 결국 하원 탄핵안 가결이라는 헌정사적 비극으로 이어졌다.
둘째, 지정학적 무지와 직관에 의존하는 위험한 태도다. 볼턴은 트럼프가 국제 정세에 대한 기초적인 상식조차 결여되었다고 폭로한다. “핀란드가 러시아의 일부인가?”라고 묻거나 영국이 핵보유국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대화에 임하는 대통령의 모습은 보좌관인 볼턴에게 공포에 가까운 당혹감을 주었다. 그는 트럼프가 전문가의 브리핑 대신 폭스 뉴스와 자신의 직관에 의존하며, 오전의 결정을 오후에 뒤집는 변덕스러운 태도가 동맹국과의 신뢰를 파괴하고 적대국인 러시아와 북한에 결정적인 틈을 주었다고 비난한다.
셋째, 독재자에 대한 기이한 매료다. 볼턴은 트럼프가 김정은, 푸틴, 에르도안 같은 독재자들의 찬사에 쉽게 현혹된다고 보았다. 특히 북미 협상 과정에서 김정은의 ‘친서’에 마음이 흔들려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비용 문제’를 이유로 전격 중단시킨 것은 볼턴의 시각에서 국가 안보를 포기한 자해 행위였다. 하노이 회담 결렬 후 김정은을 에어포스 원으로 평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제안한 대목은 트럼프가 외교적 성과를 개인적인 관계의 성취로 오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넷째, 시스템의 붕괴와 보좌관 배척이다. 볼턴은 자신의 행동을 제어하거나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보좌관들을 트럼프가 ‘방해꾼’으로 간주하고 조직적으로 배척했다고 평가한다. 결과적으로 백악관 내부의 정상적인 보고 체계와 토론 시스템은 마비되었으며, 이는 곧 국가 안보 시스템의 기능 상실로 이어졌다는 것이 볼턴의 최종적인 진단이다.
3. 원칙의 경직성 vs 직관의 유연성
그러나 볼턴의 이러한 날 선 평가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에는 그의 시각 역시 지나치게 편향되어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볼턴의 불만은 상당 부분 자신의 ‘네오콘적 신념’이 트럼프의 ‘실용주의’에 의해 거부당한 데서 기인한 측면이 크다.
우선, 재선을 의식한 의사결정에 대한 비판을 살펴보자. 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신의 정책을 지속시키기 위해 재선을 목표로 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정치 행위다. 트럼프의 재선은 그를 지지한 수천만 미국인의 가치가 지속되는 것을 의미하며, 그런 의미에서 재선 노력은 대통령 개인뿐 아니라 정부의 공동 목표이기도 하다. 볼턴이 이를 오직 ‘사적 이익’으로만 치부하는 것은 정치가 가진 대중적 속성을 간과한 엘리트주의적 발상이라 볼 수 있다.
또한, 볼턴이 ‘나약함’이라 비난했던 트럼프의 결정들은 오히려 인간적인 고뇌와 실용적 판단의 결과로 재해석될 수 있다. 시리아 아사드 정권이 일으킨 두마 사태 당시, 볼턴은 강력한 전면전을 원했지만 트럼프는 매티스 국방장관의 조언을 받아들여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는 ‘제한적 타격’을 선택했다. 이란 무인기 추락 사건 때도 마찬가지다. 볼턴은 즉각적인 군사 보복을 주장했으나, 트럼프는 무인기 한 대의 대가로 150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은 비례적이지 않다며 공격 직전 결정을 철회했다. 여기서 우리는 전쟁의 참화를 막으려 노력한 ‘인간 트럼프’의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무고한 인명 피해를 걱정하며 보복의 방아쇠를 거둔 결정은 매파적 원칙론자인 볼턴보다 훨씬 더 도덕적이고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4. 직관의 리더십: 스티브 잡스와 트럼프의 평행이론
애플의 혁신을 이끈 잡스 역시 복잡한 시장 조사나 다수의 토론보다는 자신의 날카로운 직관을 믿고 나아갔다. 외교 역시 때로는 관료주의적인 느린 의사결정보다 지도자의 과감한 결단이 교착 상태를 깨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실제로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지나치게 신중한 토론 문화와 관료 중심의 의사결정은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느린 대응’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러한 관료주의적 병폐는 결국 대중의 피로감을 불러왔고, 이는 바이든 정부의 재선 실패와 트럼프의 귀환을 이끈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볼턴이 ‘시스템의 마비’라고 비난했던 트럼프의 파격은, 사실 기존 정치권의 ‘늪(The Swamp)’을 정화하려는 시도였을지도 모른다.
5. 결론: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
존 볼턴의 《그 일이 일어난 방》은 트럼프라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해주는 귀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 책을 덮으며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트럼프가 얼마나 무지했는가"가 아니라, "원칙을 명분으로 전쟁을 불사하는 볼턴의 길과, 비록 정제되지 않았으나 평화를 유지하려 했던 트럼프의 길 중 어느 것이 인류에게 더 유익했는가"이다.
볼턴은 자신이 트럼프의 위험한 본능을 막는 보루였다고 자부하지만, 독자는 오히려 그의 경직된 매파적 사고가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트럼프는 자신만의 스타일과 논리로 국정을 운영했고, 그 과정에서 기존 외교 문법은 파괴되었으나 최소한 새로운 전쟁을 시작하지는 않았다.
결국 이 회고록은 저자인 존 볼턴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관료주의의 벽에 갇히지 않은 한 지도자의 고군분투기로 읽힐 여지를 남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완벽한 지도자를 찾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결함과 장점을 가진 리더십들이 어떻게 충돌하고 조율되어야 하는지를 깊이 고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