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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광일 Mar 22. 2018

엄마는 왜 규칙을 마음대로 정하는 거야?

실존주의 VS 국가주의

   

 초등학교 다니는 조카가 집에 놀러 오면 어머니(조카에게는 할머니)는 조카에게 용돈을 주시곤 한다. 만원이 될 때도 있고, 10만 원이 될 때도 있다. 10살 되는 조카에게는 만원도 적지 않은 돈이었다. 조카가 제일 좋아하는 500원짜리 장난감 뽑기를 무려 20번이나 할 수 있는 돈이었다. 그럼에도 조카는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며 두 손으로 공손히 받지만 얼굴 표정은 시큰둥했다.

“왜 그래?”      

 나는 조카에게 물었다. 조카는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유가 있었다. 조카는 오직 용돈의 10퍼센트만 가질 수 있고, 90퍼센트는 세금으로 자신의 엄마에게 지불해야 했다. 나는 조카가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조카를 도와서 세금의 부당함을 주장하지 않았다. 괜한 참견은 조카의 교육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대신에 만원 밑으로 용돈을 챙겨주었다. 누나는 만원 밑으로는 세금을 걷지 않았다.

 조카의 불만은 또 있었다. 조카는 할머니 집에 놀러 오면 자유롭게 놀고 싶었다. 이를테면 작은 삼촌인 나와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산책을 가는 것이다. 그러나 컴퓨터 게임은 30분이라는 시간제한이 있었다. 내가 조카에게 간식을 사주는 것도 제한되었다. 조카가 배부르면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냉장고에 있는 요구르트를 먹는 것도 금지되었다. 설탕은 몸에 해롭다는 이유였다. 조카는 자신의 엄마의 말을 충실히 따르는 편이었지만,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때쯤 되자, 다들 보는 앞에서, 자신의 든든한 지원군인 할머니, 할아버지, 작은 삼촌 앞에서 회심의 반격을 했다.      

 “그런데 엄마는 왜 자기 마음대로 규칙을 정하는 거야?”

 “응? 뭐?”

 “아니, 규칙을 정할 때는 서로 의논해서 정해야 하는 거 아냐? 왜 엄마 마음대로 규칙을 정하는데?”

 누나는 할 말을 잃었다. 다만 동그란 눈을 뜬 채 이 상황을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였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조카의 날카로운 질문이 한편으로는 대견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여 하하 호호 웃으셨고, 나는 조카가 철학적 사고에 소질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조카의 의문은 실존주의 철학과 맥이 닿았다. 우리는 대개 주어진 사물과 제도를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관성이 있다. 예를 들면 성인이 된 남녀는 취업하면 결혼해야 하고 결혼하면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는 몸이 건강한 20세 이상의 성인 남자는 군대에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반대의 경우는 극히 예외의 사례 거나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실존주의는 사람들이 관성적으로 제도와 사물을 받아들이는 것을 비판한다. 원래부터 정해진 것은 없다. 모든 사물과 제도는 누군가 정해놓은 것일 뿐이다. 우리는 관성에 따르지 않고 그것을 거부할 자유가 있다. 조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조카는 용돈의 90퍼센트를 세금으로 내고, 컴퓨터 게임을 30분 이상 할 수 없으며, 간식도 먹을 수 없고, 설탕 음료를 먹을 수 없는 규칙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그는 그것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하는 중이다.

 나는 이 상황에서 어찌해야 할까? 조카의 선언에 힘을 보탤 것인가? 아니면 조카의 당돌한 반항을 무력화할 것인가?

 나는 누나의 손을 들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부모는 누나고 조카는 부모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조카의 반항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잠재울 것인가? 홉스의 리바이어던 가설이 떠올랐다. 홉스에 따르면, 자연 상태에서 이기적인 사람들은 서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수많은 다른 사람들과 물고 뜯고 싸워야 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싸웠지만, 좁쌀 한 톨의 재산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고, 자기보다 강한 자에게 많은 것을 빼앗겨야 했으며, 늘 궁핍했고,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몰라 전전긍긍해야 했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권리를 국가에 양도하였고,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국가에 통제를 받는 쪽을 택했다는 것이다. 국가주의 국가론으로 알려진 홉스의 이론이다.  이것은 홉스의 가설일 뿐이다. 나는 홉스의 리바이어던 가설을 믿지 않는다. 다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꽤 유용했다.      

 “태연아. 삼촌이 그 이유를 말해줄게.”

 “응.”

 “엄마가 태연이 밥 해줘 안 해줘?”

 “밥 해주지.”

 “뿐만 아니라 옷도 입혀주고, 잠도 재워주지. 그렇지?

 “응.”

 “태연이는 엄마 보호를 받는 거잖아. 그렇지?”

 “응.”

 “그러니깐 엄마 말을 따라야 하는 거야. 알겠지.”

 조카는 한편으로는 삼촌의 말을 이해하겠다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에는 불만이 남아 있었다. 누나는 이 광경을 보며 조카 등 뒤에서 조용히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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